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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한 '조선시대 3대 시장' 강경...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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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강경시장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강경은 옛 영화를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쪼그라들었지만, 금강 하류의 이 소읍을 한두 시간 자박자박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과거의 명성과 만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짓고 살던 적산가옥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고, 현대식 건물과 확연히 다른 모양을 한 이들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주요 거리를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해 건물들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논산시는 개발도 병행하면서 과거 번성했던 강경 재건을 꾀하고 있다.
호남선 강경역에서 내려 5분을 걸으면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낀 역사기행이 시작된다. 차량 이동보다는 도보 이동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가다 보면 발길을 잡아끄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차려진 코스는 모두 4가지. 제1코스 근대문화유산코스, 제2코스 상업문화코스, 제3코스 유교문화코스, 제4코스 성지순례코스다.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강경의 근대역사문화 공간을 둘러볼 수 있는 1코스. 강경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시작해 구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스승의날 발원지(강경여중고)→빛의 광장→강경 구연수당 건재 약방→본정통거리→대동전기상회→객주촌→구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역사관)→젓갈시장4거리(상징조형물)로 이어진다.
강경이 조선시대 3대 시장과 포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금강에 있다. 금강이 휘감아 도는 강경은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이 발달해 조선시대에 평양, 대구와 함께 다양한 지역의 산물들이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만큼 돈이 돌았고, 그 풍요 속에서 근대문화가 꽃을 피웠다.
강경은 현재 인구 8,000여 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해 수산물과 호남 곡물, 포목거래와 중국 상선이 드나들던 무역항이었다. 1870년 무렵 점포 수는 900여 개에 달했고, 1970년대까지 상주 인구 3만 명에 유동인구가 하루 10만 명이었다.
금강 하류이지만 수심이 깊어 제법 큰 고깃배와 상선이 오갔다. 충청내륙과 호남지방까지 넓은 시장을 배후에 뒀던 덕분에, 해당 지역의 산물이 강경으로 몰렸던 까닭에 하루 100여 척의 선박이 강경을 오갔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강경은 서해와 중국의 소금을 전국에 공급하면서 더욱 번성했다. 수백 명의 직원을 데리고 소금을 공급하던 객주들은 대금업과 수산물 도매로 막대한 자본을 형성했다. 인근 군산항 개항으로 수입 화물 80%가 강경시장을 통해 나가면서 수산물, 곡물, 공산품을 아우르는 국제중개항 역할을 했다.
하지만 철로가 뚫리며 상권이 흔들렸다. 운송능력이 수십 배인 철도의 기세에 눌려 한때 침체되는 듯했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쌀 수탈로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강경과 군산을 관문으로 삼은 일제는 최신식 도정공장을 짓고 쌀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1924년 어선과 교역선 보호, 수산물 하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제방을 쌓고 갑문을 만들자 일본인이 몰려왔다. 한때 일본 상인은 1,500여 명으로 늘었고 강경 상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당시 시가지엔 그들이 지은 관청, 공공건물, 학교, 각종 상점과 금융, 점포병용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일제가 패망하자 강경포구도 시들었다. 광복 이후 군청이 논산으로 옮겨갔고, 덩치를 키운 대전과 익산의 상권이 강경을 위협했다. 여기에다 금강 하구에 토사가 쌓이면서 화물선과 큰 고깃배 접안이 힘들어졌고, 강경의 상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0년 금강하굿둑이 생기면서 강경은 포구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강경항에는 현재 140여 개의 젓갈도소매점들이 있다. 200년간 이어온 수산물가공법과 염장법을 이어온 후손들이 운영하는 것들이다. 젓갈의 전국 유통량 50% 이상이 이곳에서 비롯된다.
강경을 더 깊게 들여다보기를 원하는 이들은 읍내 중심에 위치한 강경역사문화안내소와 역사문화연구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강경의 역사소개와 함께 여러 가지 자료를 구할 수 있고 여행동선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곳의 안내를 받아 읍내를 걷다 보면 1920년대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금강 제방 옆에 낮은 건물들이 올망졸망 자리 잡은 강경읍내는 도심 중심부에서 반경 1㎞ 이내에 대부분의 볼거리가 몰려있다. '소읍 하나가 우리나라 근대사를 담고 있는 박물관이라니...'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근대건축물만 11곳이다.
김무길(80) 강경역사문화연구원 연구부장은 "강경의 역사를 알고 여행하면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며 "폐가와 다름없는 건물에도 100년의 역사와 수많은 사연을 담고있어, 당시를 상상하며 돌아보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강경역사문화안내소로 사용 중인 건물은 부두노동조합 사무실로 쓰이던 공간이다. 1925년 지어진 2층 건물로 2009년 일부 무너진 곳을 복원했다. 강경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은 옛 한일은행이었다. 그 이전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던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이 있던 곳이다. 1905년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축물은 3층 높이를 하고 있지만, 안으로 들면 단층짜리 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길모퉁이를 돌면 젓갈시장 사거리가 나온다. 전통 새우잡이 통발 모양을 형상화한 상징 조형물은 강경의 옛 명성을 알리고 있다. 도로 양쪽에 늘어선 젓갈집에 들러 짭쪼름한 젓갈 쇼핑도 여행의 별미가 된다.
젓갈시장을 지나 '본정통거리'에 들어서면 일본인이 남기고 간 건축양식 그대로 다시 세운 건물들이 많다. 건물들을 자세히 보면 '대동전기상회' 등 벽에 글자와 간판을 새겨넣은 '건축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건축물이 아니더라도 큰길을 벗어나 골목에 들어서면 일본 잔재가 대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폐쇄한 지 오래돼 먼지와 거미줄을 뒤짚어쓴 골목의 낡은 이발소나 오래된 창고, 점포는 영화에서나 보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근대역사문화거리 구경을 마쳤으면 강경 최고의 전망대인 옥녀봉에 꼭 올라야 강경관광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세트장 같은 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해발 44m에 불과하지만 강경에서 가장 높은 옥녀봉이 나온다. 아래로 금강이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어 이곳이 포구였음을 일깨워 준다. 이곳에서 해질 무렵 황금빛으로 물드는 일몰 풍경은 일품이다.
강경은 금강 수로 영향으로 서양 종교가 일찍이 전해진 곳이다.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와 천주교 등 작은 읍내에 유난히 교회 건물이 많은 이유다. 읍내 가운데에 위치한 강경천주교회는 배를 뒤집어 놓은 듯한 아치형 골조로 건축됐다. 인근에는 김대건 신부가 유숙했던 장소가 남아 있다.
1923년에 세운 강경성결교회예배당은 기독교 토착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초기 한옥교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 감리교회로 넘어갔다가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성결교회에서 다시 매입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던 건물이다.
근대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변 언덕에는 죽림서원ㆍ임리정ㆍ팔괘정 등 조선시대 유적이 연이어 남아 있다. 임리정은 인조 4년(1626) 김장생이 건립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인근 팔괘정(八卦亭)은 우암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가까이 하기 위해 건립하고 강학한 정자다. 두 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더욱 운치 있다. 앞마당에 서면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부여의 너른 평야가 넓게 펼쳐진다.
논산시는 강경에 ‘근대역사문화촌’을 조성 중이다. 논산시 관계자는 "일부 건물을 사들여 근대 건축양식으로 개축하고 숙박업소나 공방 등을 유치하고 있다"며 "강경을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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