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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권의 핍박 속에 피어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

입력
2022.03.08 04:30
25면


예술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지향하는 활동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역 말레비치는 우크라이나 출신 미술가라는 아이러니
'러시아 아방가르드'전(~4월 17일)은 예술가의 소명을 확인케 하는 유의미한 사건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에 전시중인 우크라이나 출신 화가 말레비치의 작품 '절대주의'. 한지은 인턴기자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에 전시중인 우크라이나 출신 화가 말레비치의 작품 '절대주의'. 한지은 인턴기자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시 곳곳 건물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내걸리고 있으며 일부 시민들은 러시아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열망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열망과 항의 시위는 러시아 영토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국민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선량한 국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서방국들이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데 있다고 보기 어렵다. 독재자 집단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저항 의지가 물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 보편적 가치에 엇나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행동들은 예술가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주어진 책무였다. '시대의 아들'로 불리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역사화하고 문화유산으로 구현해내는 일을 담당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20세기 초 러시아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 열리고 있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를 비롯한 49명의 작가 75점의 작품을 경향별로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해 전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예민해진 것 같다. 우크라이나 국민을 지지하는 성명이 줄지어 나오는 가운데 러시아의 이름을 내세운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가 문제의 전시로 지목받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이 전시를 둘러싼 비판적 시각은 역전되어야 한다. 혁명을 전시 주제로 내세운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정치와 예술 사이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속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흐름에 동조한 이들이었으나 후에 관료화된 집권 세력으로부터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태동한 전위적 예술 경향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이른바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시기이니 전쟁과 혁명의 시기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을 담고 있다. 재정 러시아에서 태어나 살았던 러시아인들이 갈구했던 것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삶이었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위한 함성이었으며 봉건주의의 구태를 벗어버리려는 시민들의 혁명이었다. 전제군주정 시대의 러시아인들에게는 프랑스대혁명의 사례가 유토피아를 실현한 사례로 여겨졌고 이러한 마음으로 러시아혁명에 동참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소련 공산당이 주도하는 가운데 공산주의라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현실로 전개되었다. 결국 1991년 소련의 몰락으로 처참히 종식되었고 그 결과 진행된 위성국가들의 독립은 오늘과 같은 후유증을 만들게 되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결국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대한 성찰과 대응을 했던 예술가들의 역사를 방증하고 있다.

이 비극적인 스토리를 좀 더 살펴보자. 이번 전시에 대표자로 참여한 두 명의 작가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출신이고 말레비치는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출신 작가다. 당시 우크라이나 영토는 제정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련에 속해 있었다. 말레비치가 남긴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가 1910년대 추진했던 '절대주의' 이론과 작품들은 정권에 의해 몰수되었고 간첩 혐의로 실형을 두 차례나 받으며 억압 속에서 살다 1935년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정권에 의한 억압 상황은 칸딘스키도 다르지 않다. 그는 혁명 직후 모스크바로 귀국해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볼셰비키 정권은 그의 추상미술 이론과 작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결국 칸딘스키는 독일로 다시 돌아가 무국적자로 지내야만 했고 말년에는 프랑스로 귀화해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 대부분은 1924년 이후 집권한 스탈린에 의해 억압받았다. 그 결과 이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자신의 예술을 현실에 맞게 구상적 경향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1938년 대숙청 시기를 전후해 재판도 없는 총살형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결국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정치와 혁명 그리고 전쟁의 시기에 예술가들이 어떻게 현실에 부응하고 대처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예술운동이었다. '실패한 혁명'으로도 불리는 이 운동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지구촌 예술을 선도하는 성공한 혁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비단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영화, 디자인, 문학, 건축에 이르는 전 분야의 예술인들이었다. 이들의 업적이 문화 현상으로 역사화되고 오늘에 이어지는 것은 당대 예술가들이 지향했던 가치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울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4월 17일까지 열리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은 우리 모두에게 예술가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인케 하는 유의미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김영호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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