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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금융전쟁' 패배... 강대국 토대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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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러시아 재정은 원유와 천연가스 비중이 높은 에너지 의존 경제다. 전체 수출액의 50%를 차지하는 에너지 수출대금이 없다면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한다. 러시아는 배럴당 국제유가 50달러 수준에 맞춰 그 이상의 수출대금은 외환보유고에 넣어 비축해 왔다. 이렇게 모인 보유외환은 6,300억 달러를 넘어 세계 수위를 다툴 정도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제재를 견뎌낼 버팀목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당시의 제재에도 푸틴은 막대한 보유외환의 27%(1,350억 달러)를 풀어 외환시장을 방어하고 지지세력과 기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푸틴의 계획은 미국과 유럽이 중앙은행 제재란 강수를 두면서 무산됐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 해외에 있는 러시아 중앙은행의 자금을 동결한 조치다. 보유외환 6,300억 달러 가운데 동결을 피한 것은 600억 달러 수준의 위안화, 1,320억 달러에 달하는 금이었다. 이마저도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직접 보유 중인 120억 달러에 불과해 루블화는 이미 30% 넘게 폭락했고, 국가신용등급은 정크 수준으로 추락했다. 루블화 폭락에 따른 고금리, 고물가의 대가는 평균 월급 450달러에 불과한 러시아 국민들이 치러야 한다.
붕괴된 금융시장을 놓고 1998년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떠올리는 전문가들도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의 국가와 민간채무는 4,900억 달러로 1년 내 갚아야 할 단기 부채는 1,700억 달러 수준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 길어지면 상환 압박은 부담하기 어려운 수준이 된다.
국제금융연구소(IIF)는 냉전이 해체된 1991년의 충격에 비교했다. 당시 러시아의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 3조2,000억 달러 수준에서 1조5,000억 달러로 내려왔고, 회복에만 15년이 걸렸다. 러시아 전문가인 롭 퍼슨 미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중앙은행 제재는 서방 무기고에 있는 진정한 핵 옵션”이라고 평했다. 푸틴과 러시아중앙은행이 루블화 폭락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든 탓이다. 골드만삭스의 외환전문가인 카막샤 트리베디는 “경제제재에 따른 루블화 절하를 막아낼 모스크바의 주력이자 제1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했다.
러시아 내부의 시각은 서방과는 조금 다르다. 싱크탱크인 러시아국제문제위원회(RIAC) 안드레이 코르투노프 사무총장은 러시아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이 많은 부족사태를 견뎌낸 사실을 거론하며 “푸틴의 러시아는 아직 그만한 위기의 도전에 직면해 있지 않다”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러나 경제제재의 방어막이던 보유외환마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인내의 시간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전비로 많은 현금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푸틴의 러시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러시아 금융전쟁은 현대전이 육해공군의 전투가 아닌 네트워크화된 글로벌 경제에 따른 하이브리드 형태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외국인 직접투자, 자유로운 자본이동, 낮은 무역장벽으로 누려온 세계화가 막상 러시아를 옭아매는 무기가 된 셈이다. 애덤 투즈 컬럼비아대 교수는 블로그에 쓴 글에서 시장 경계가 사라진 글로벌 세상에서 한 나라가 어떻게 퇴출되는지를 처음으로 목도하고 있다고 평했다.
푸틴이 계획대로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권을 세운다 해도 경제제재, 특히 금융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상당기간 강대국 토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지점은 누구보다 푸틴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데 있다. 푸틴이 위험해 보이는 것도 이런 무모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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