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을 의심해보자

입력
2022.03.01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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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 신뢰 자본'의 가치를 강하게 믿는 사람이다. '바깥은 휠체어에 안전하다'는 신뢰가 없었을 때는 휠체어 타는 아이를 아예 내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하철 승강장과 열차 사이에 아이 휠체어 바퀴가 끼어 '이러다 죽는 거 아냐'란 공포를 심하게 느꼈을 때 더 그랬다. 엘리베이터 장기 공사나, 앞을 가로막은 턱들을 볼 때마다 아이가 떠올라 괴로웠다.

그런데 휠체어를 실제로 타는 내 딸은 (내가 보기엔) 용감하게 여기저기 잘도 다닌다. 많이 나가봤더니 꼭 들어가고 싶은 곳에 턱이 있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요령이 생겼다. 꼭 필요한 경우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휠체어에 완벽히 안전하지 않더라도 휠체어라는 낯선 이동수단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서투르게나마 익숙해질 수 있다는, 또 그 사람들도 변화할 수 있다는 신뢰가 생긴 것 같다. 아이의 신뢰를 만들어 주는 건 결국엔 외출에서 마주치는 사람과의 경험이다.

그런데 신뢰를 갉아먹는 이유 또한 사람이다. 주로 왜곡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지하철 안에서 아이를 보고 "세상 참 좋아졌어. 옛날에는 다니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야"라고 툭 내뱉은 한 노인이 생각난다. 이런 분들에게 저절로 좋아진 것은 없으며 장애인분들이 열심히 시위해서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생겼다고 설명하면 보통 화를 낸다. 믿음이 완고하게 굳어진 것이다. 이런 사람과 말싸움을 하는 건 기운 빠지는 일이고, 심한 경우 트라우마가 생겨 외출이 꺼려진다. 나갈 때마다 이런 사람과 마주친다면 아이가 갖게 된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을 수 있다.

예일대 역사학과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에 따르면 신뢰(trust)와 믿음(belief)에는 차이가 있다. 신뢰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낯선 이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 데에 있다. 신뢰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으로 토론하고 변화를 만든다. 그와는 달리 (맹목적인) 믿음은 다른 생각, 성향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팩트를 들어도 부인하는 것이다. 스나이더 교수는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 동유럽, 구소련 역사 전문가다. 사회에 신뢰가 줄고 맹목적 믿음이 창궐하면 민주주의에 해로우며 궁극적으로는 독재의 싹이 된다고 말한다.

가뜩이나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정보를 해석할 시간이 없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너무 많이 돌아다닌다. 잘못된 정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뢰 사회와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다. 이보다 더 좋지 않은 건 '이익에 반한다'며 의도적으로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갈라치기하는 것이다. 팩트로 설득하던 사람들도 질려서 외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후보를 선택할 때 내 믿음이 혹시 다른 의견을 듣지 않아서 생긴 게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이건 왜 이렇지?'라며 다소 시간이 걸려도 맥락을 파악해 보면 어떨까. 맥락을 알면 믿음에 오류가 있음을 직시할 때도 있다. 당장의 내 이익 뿐 아니라 장기적인 공동체 이익도 볼 수 있게 된다.

한쪽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갈라치기를 단호히 배격하는 시민이 많을수록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리더가 뽑힐 가능성도, 믿음 대신 신뢰사회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홍윤희 장애인이동권증진 콘텐츠제작 협동조합 '무의'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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