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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들의 시국, 안젤라의 시국, 홀어멍의 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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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국이 심상치 않으니까 그렇지."
동네 목욕탕에서 '시국'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탕에 몸을 담근 6080 할매들이 다가올 선거와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시국이 왜 심상치 않은데요?"라며, 슬그머니 할매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선거 날짜는 다가오는데 영 마음 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웬 마누라들 이야기뿐이니, 다 듣기 싫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구별이 되는 후보가 있지 않겠어요?"라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심상정이가 말은 참 똑 부러지게 잘하는데…" 끝맺지 못한 그의 말에는 거대 양당 정치로 훼손되는 현 정치 국면의 모순이 묻어났다.
19일에는 다른 곳에서도 이 '심상치 않은 시국'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내 편 만들기'가 정책의 자리를 차지하고, 무시와 조롱과 혐오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주권자 사이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토론을 대신하는, 그야말로 탈정치화되고 시장화된 정치에 관해 여성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토론회를 연 것이다. 젠더에 기반한 여성 폭력을 '사회적 재해'로 인정하고 시민사회와 국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 2021년 보궐선거에서 제3의 정당 정책을 선택한 15% 여성들은 동등해질 권리가 아니라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해나갈 권리로서 주권자 권리를 명백히 제시했다는 이야기, 우리는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우리의 가치에 투표하자는 힘찬 제안 등, '세대와 젠더 분열을 넘는 페미니스트 주권자 행동 포럼' 시국 토론회를 채운 말들은 여성들이 시국을 어떤 자리에서, 어떤 관점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가를 똑똑히 증언했다.
'54년생 안이희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책 '안젤라'에서 저자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안젤라는, '시국을 보고 느끼고 행동할 자유'에 추동되어 행한 발언과 행동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견뎌내야 했던 평생의 삶에 대해 전한다. 잡혀갔고, 고문을 당했고, 평생 언어 분열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직장, 건강, 미래를 잃었지만, 그러나 지독하게 지켜 낸 것이 있으니, 모두의 명예와 목숨이었다고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시국이 역사적으로 어떤 정치적 삶의 국면을 가리키는지, 여성들은 시국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관해 더욱 통렬하고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주는 사례가 있다. 4·3을 겪고 이후 자식들을 키우며 마을을 재건한 제주 홀어멍들의 이야기다. 홀어멍들의 경험을 인류학적 민족지 기술로 접근한 김은실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고통과 공포, 폭력을 "시국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마을의 삶의 시간적 연속성이 근본적으로 와해되고, 마을공동체 내 사람들의 관계가 정지되고, 마을의 질서가 통제 불가능해진 시공간의 사건인 4·3. 시국은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부재한 상태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국 때문에 그 '추접한 것'이 일어났고, 이후의 삶은 추접한 기억을 몸에 가두고 견디는 시간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제 시국은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시국에 관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공론장을 열고, 정치적 견해를 말한다. 해오던 대로 가치를 벼르고, 정의로운 연대를 하자고 제안한다. 이 심상치 않은 혼란스러운 시국에 오가는 분별 있는 견해들에 정작 들어야 할 이들은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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