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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욕해도 좋으니 대권 후보들에도 한마디만" 지하철을 멈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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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광화문역 지하철 승강장이 경찰들로 가득 찼다. 평화로운 일상의 공간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6-3 하차'를 외치는 무전에 분주하게 자리를 옮기는 발소리들이 승강장을 채웠다. 도착한 열차의 열린 문틈 사이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은 문이 닫히지 않게 막고 발언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목에 "장애인권리예산 보장하라"는 자신의 몸집만 한 피켓을 걸고 있었다. "16년 동안 아무리 외쳐도 법적 권리조차 지켜지지 않았다"며 "저희를 버리고 가시겠습니까"라는 호소가 울려 퍼졌다.
멈춰선 열차 안은 그들의 외침으로 어수선했지만 승객들은 차분해 보였다. 경찰도 "의도적 지하철 운행 방해에 조치하겠다"고 말했지만 강제로 제지하진 않았다. 발언을 마친 활동가들이 내리려고 하자 이를 돕기도 했다. 그 순간에도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로 정상적인 열차 운행이 방해받고 있다"는 방송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몇 개의 휠체어가 줄지어 내려 반대 방향 열차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이질적인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해 12월부터 지하철 출근길 선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오전 7시 30분경 지하철 승강장에서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6일은 50번째 선전전을 벌인 날이었다. 이날도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광화문역을 거쳐 혜화역 4호선 승강장에서 종료됐다.
장애인 활동가들이 지하철에 오르자 한 승객이 "아후 또 시위야?"라며 짜증 섞인 혼잣말을 했다. 함께 탄 경찰에게 "이거 언제까지 해요?"라고 조용히 묻는 승객도 있었다. 일부는 표정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승객은 무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선전전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열차 중앙에 한 줄로 자리를 잡고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다른 활동가들은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지하철 곳곳에 부지런히 붙였다. 전동 휠체어를 탄 한 활동가는 손을 쭉 뻗어 겨우 닿는 좌석에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다.
"저희들 때문에 며칠째 불편함이 많은 것 압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21년 동안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다 가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버스 위에도 올라가고 지하철 철로에도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교통약자법이지만 정부는 스스로 약속한 법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명시된 기본적 권리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대표로 마이크를 잡은 박경석 전장연 상임대표가 호소했다. 그는 "저희에게 욕하는 만큼 주권자인 여러분들이 대통령 후보들에게도 한마디만 해주십시오"라며 "대통령 후보들이 법적 권리 보장을 위한 예산만 약속하면 우리는 출근 투쟁을 멈추겠습니다"라고 시민들의 지지를 부탁했다.
지하철이 승강장에 도착하자 내리려던 장애인 활동가들이 문 앞에 멈춰 섰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 작은 틈 때문이다. 비장애인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작은 틈에 이들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경찰은 급하게 이동용 발판을 찾아왔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선전전이 아닌 일상의 순간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를 일이었다.
전장연이 요구하는 건 비단 지하철 이동권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이동권·교육권·노동권·탈시설권리의 보장을 주장한다. 세부적으로 △장애인 특별교통수단과 평생교육시설 운영비에 대한 국비 책임 및 보조금법 시행령 개정 △장애인 활동지원 하루 최대 24시간 보장 예산 책임 △장애인 탈시설 예산 증액 △대선 후보자들의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 약속 등이다.
이들의 '장애인 권리 예산을 보장하라'는 구호에 "결국 돈 때문이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전장연 측은 "법이 제·개정되더라도 결국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획재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지난해 말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교통약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와 특별교통수단의 시외 운행에 필요한 예산의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특별교통수단이란 교통약자의 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휠체어 탑승설비를 장착한 차량으로 장애인 콜택시 등을 말한다.
그러나 예산안은 국토 교통위원회를 거치며 의무조항('지원해야 한다')에서 임의조항('지원할 수 있다')으로 바뀌었다. 장애인권단체들은 예산을 반영하지 않거나 턱없이 모자라게 반영해도 법적 문제를 피하려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전장연은 지금까지 법으로 보장되거나 정부기관이 공식적으로 약속한 사안도 지켜지지 않았다며 법에 명시된 권리의 보장을 위해 예산 확충 방안을 명확히 하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 3차 계획에 따르면 42%에 도달해야할 전국 평균 저상버스 도입률은 30%를 넘지 못했다. 반복적인 예산 삭감 탓이다. 2022년까지 서울 지하철에 승강기를 100% 설치하겠다는 서울시의 선언도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장애인권단체가 '이동권'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이동권이 선제돼야 다른 권리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만난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유진우 활동가는 "이동권은 모든 권리 보장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장애인들이 집 밖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고 취미도 즐길 수 있고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며 "이를 보장하지 않으면 장애인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회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사망사고 이후 '이동권 투쟁'이 시작되며 지하철 역사 내 승강기 설치율은 크게 높아졌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현재 시외·고속버스의 경우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차량은 21년 기준 7대에 불과하다. 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의 시외운행이 필요한 이유다. 기획재정부는 "특별교통수단 운영비는 보조금법 시행령상 국비 지원이 불가한 사업"이라며 예산 지원을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유진우씨는 탈시설권리에 대해서도 "여전히 전국적으로 3만 명 정도가 사회에서 분리된 채 시설에 갇혀 살아간다"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프라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탈시설 로드맵에서 탈시설 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한다면서도 확보되지 않은 예산의 공백을 비판했다. 장애인 거주시설 예산이 6,224억인 것에 비해 탈시설 예산은 24억으로 책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예산으로 선택을 하라는 건 이치에 안 맞다"며 비슷한 수준의 탈시설 예산을 주장했다.
그는 "지하철에서 멈춘 몇 분의 시간은 수많은 장애인들이 잃어버렸던 주체권을 찾고 회복하는 시간인 것 같다"며 "효율성만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을 멈추고 배제돼 온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똑같이 이동하고 싶고, 교육받고 싶고, 노동하고 싶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2개월 넘게 출근길 불편을 야기하고 있는 전장연의 시위에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출근길에 이어지는 선전전 때문에 회사에 지각했다는 글이 여럿 올라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론이 나빠지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5호선을 이용해 출근하는 직장인 이모(25)씨는 "시위가 있는 날이면 평소보다 두 배가 걸린다"며 "출근을 서둘렀는데도 지하철 연착으로 중요한 아침 회의에 지각했을 때는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너무 자주 하니까 솔직히 이젠 너무하단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불편에 대한 항의를 넘어 점차 혐오로 번지는 양상이 보이기도 한다. 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는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시민분들이 그들(장애인)을 밀어서 내보내고, 승강장까지 못 들어오도록 엘리베이터를 점거하면" 시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혐오는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위협으로 이어졌다. 사이버 공격에 전장연의 홈페이지가 다운되고, 한 남성이 전장연 사무실로 찾아와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을 가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유진우씨는 지난 16일 회사로 찾아온 신원 미상의 남성에게 심한 욕설과 협박을 당했다. 건물 1층에서 만난 유씨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하던 남성은 "다리 부러트려줄까"라며 위협을 했고, 녹음 중인 유씨의 휴대폰을 강제로 뺏으려 하기도 했다. 다행히 주변을 지나던 시민들의 도움으로 더 큰 화는 피할 수 있었다.
해당 사안이 '장애인'과 '피해받는 시민'을 구분 짓는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장애인 시위 맞서기 시위'를 내세우며 전장연의 전단지를 제거한 것을 인증하기도 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그들에 의해 피해 보는 시민이 직접 전단지를 떼는" 행위에 대한 칭찬과 응원을 보냈다. 직장인 추모씨(30)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지하철 연착으로 20분이나 지각을 했다"면서도 "찾아본 기사 댓글에 장애인 단체에 대한 분노와 비난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 전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 없이 서로 편을 나눠 싸우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 11월 전장연과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서장연) 측에 '고의로 열차 운행을 지연시키는 불법행위'를 이유로 3,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경찰 역시 지난달 17일 서장연의 상임대표를 집시법 위반 및 일반교통방해, 감염병예방법 위반 및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입건했다. 이에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우리에게 불법이라고 이야기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겠다"며 "다만 법으로 보장된 우리의 권리, 장애인권리법안도 지켜달라"고 말했다.
부정적인 여론 속에서도 전장연 측은 기재부가 시행령 개정으로 장애인 이동권 예산 근거를 명확하게 하고, 대통령 후보들이 권리 예산의 보장을 약속하기 전까지는 선전전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시민들의 불편이 계속되고 장애인 단체에 대한 혐오가 번지고 있는 상황에도 대통령 후보들과 기재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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