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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아재 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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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다니던 회사에 스스로 상당히 젊은 감성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중년 상사가 있었다. 직원들이 잡담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끼어들어 자신의 유머 감각을 뽐내고, 그들의 '아…하하…하…' 하는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뿌듯하게 돌아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실 이뿐이라면 귀여운 개그 욕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업무에서도 그 자부심을 놓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홍보물이나 서비스를 구상할 일이 있을 때 그는 듣기 민망할 정도로 촌스러운 자신의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늘 '2030은 이런 걸 좋아한다'는 말을 만능 논리처럼 덧붙였다. 당시 그 회의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은 (그를 제외하고) 모두 20~30대였는데, 그가 내놓은 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결과도 좋지 않았다.
요 며칠 대선 후보들의 'MZ세대 맞춤형 선거운동'을 보면서 오랜만에 그 회의실의 기억이 진하게 떠올랐다. 주요 후보들이 청년들의 마음을 잡겠다며 앞다투어 OTT 형태의 캠프 페이지를 만들고 킥보드 유세단을 꾸리고, 공약을 게임과 만화로 표현하고 있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아찔하다. 아, 이렇게 거대한 '아재 개그'라니.
이 안타까운 시도에는 여러 문제가 있는데, 그중 첫째는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의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분명 OTT 서비스의 헤비 유저다. 간단한 게임과 MBTI 테스트를 좋아하고 킥보드도 즐겨 탄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오락과 편의를 위한 행동 패턴이지 모든 일상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지는 않는다. 이들 역시 지식이 필요할 때는 뉴스와 책을 뒤지고 업무와 과제를 할 때는 문서작업을 한다.
대통령 후보의 공약을 MBTI 테스트로 보여주는 일, SNS에 한 줄로 공약인지 선언인지 모를 문장을 적는 일, 유세단이 킥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일이 결코 청년들의 정치 접근성을 높여주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이라면 애초에 다른 오락거리 대신 굳이 이를 즐기지 않을 것이고, 공약을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유권자라면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기만 어려울 것이다.
둘째 문제는, '오직 청년을 위해' 이 요란한 퍼포먼스를 만든 것 자체가 현실 정치의 문제와 청년의 삶을 개선할 방안에 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 반증이라는 점이다. 청년 유권자가 냉소적으로 변한 것은 정치에 재미를 못 붙여서가 아니라 불평등과 불안정성, 권력층의 비리로 인한 정치 불신이 누적된 결과다. 그런데 정책과 공약을 오락거리에 가볍게 녹이려 한 것은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유권자가 이를 즐길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청년층에 대한 이해도 잘못되었다.
중요한 것은 늘 포맷보다 내용이다. 잇단 비리 의혹을 해결하지 못한 후보가 공약 게임을 만든다고 해서, 과학고와 인크루팅 앱의 존재도 모르는 후보가 킥보드를 탄다고 해서 청년 유권자들과 가까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연령층이 그렇듯 청년 역시 같은 언어로 이야기할 대통령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진정성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줄 대통령을 원한다. 대선까지 앞으로 3주. 이제는 후보들이 공허한 MZ 타령을 할 시간에 보다 깊은 청년 담론을 진지하게 꺼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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