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감축 방안 내놓으세요" 대기업 10곳 꼬집은 네덜란드 연기금

입력
2022.02.17 08: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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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850조 운용 세계 3대 연기금 운용사 APG
삼성전자 등 지분 투자한 10개 대기업에 서한
"한국 대기업 국제 위상 비해 노력 부족 우려,
자산가치 하락 막기 위한 투자자로서 행동"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들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한 위헌 심판을 신속히 진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청소년기후행동 활동가들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한 위헌 심판을 신속히 진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회사가 보다 전향적이고 혁신적인 탄소배출 감축에 대한 선언과 실행방안을 준비하고 있다면, 이번 정기주주총회를 전후하여 발표하실 것을 건의드립니다.”

최근 삼성전자ㆍ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 10곳의 경영진은 '큰손' 투자자에게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서한을 받았다. 발신자는 유럽 최대 연기금인 네덜란드 공적연금을 운용하는 APG(All Pension Group). APG는 세계 3대 연기금 운용사로 1월 기준 약 850조 원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으며, 서한을 보낸 기업 10곳의 지분도 소유하고 있다.

서한에는 5가지 질의나 제안이 들어 있다. 지난 5년간 탄소배출 감축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보는지, 이 이슈에 대해 장기투자자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조언을 듣고 있다고 보는지 등이다.

서한을 보낸 이유에 대해 박유경 APG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책임투자 총괄이사는 15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산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투자자로서의 행동이자, 연금 수탁자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기업인들의 책임 또한 강조했다. 박 이사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50% 이상 줄이려면 기업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수”라며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드라인’이 불과 10년도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APG가 국내 10개 대기업에 전달한 '기후위기 대응 및 탄소배출 감축 전략의 혁신적인 실행에 대한 제언' 서한의 일부. 각 사의 탄소감축 전략에 대해 적절성을 검토하고 주주에게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APG가 국내 10개 대기업에 전달한 '기후위기 대응 및 탄소배출 감축 전략의 혁신적인 실행에 대한 제언' 서한의 일부. 각 사의 탄소감축 전략에 대해 적절성을 검토하고 주주에게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APG는 한국 대기업들이 국제적 위상에 비해 기후대응 노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일본ㆍ인도 등 아시아 다른 국가에 앞서 한국 기업에 먼저 서한을 보낸 이유다.

APG가 선정한 10개 대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동종 업계의 다른 글로벌 기업에 비해 높다. 삼성전자의 2020년 매출액 대비 탄소배출량(탄소배출량을 매출액으로 단순 나눈 수치)은 8.7%인데 이는 같은 IT제조업체인 애플(0.3%)과는 큰 차이가 난다.

탄소감축에 관심을 보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부재한 경우도 많다. SK그룹은 지난해 RE100(재생에너지 100% 활용 캠페인)에 가입했지만 정확한 탄소중립 시기나 계획을 제시하지 않았다.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 경영 관련 정보 공개 수준이 낮은 것도 공통된 문제다.

그래픽= 송정근 기자

그래픽= 송정근 기자

이는 연금운용수익과도 직결되는 위험 요인이다. 박 이사는 “탄소감축을 하지 못할 경우 기업가치가 줄어들 수 있어 신속한 대처를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온실가스 배출을 상쇄하려면 탄소배출권 구입 등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배출권 가격은 각국의 배출규제가 강화되면서 점점 상승하는 추세다. 유럽연합(EU)이 도입을 추진하는 탄소국경세 제도 등 무역규제도 위험 요인이다.

박 이사는 “한국 기업들은 ‘만약 우리가 탄소중립 목표를 발표해놓고 달성을 못하면 어떻게 하냐’라는 고민을 갖고 있지만 이는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마찬가지”라며 “대기업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해 결단을 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APG는 각 기업의 행보에 따라 향후 추가 행동도 고려하고 있다.

박유경 APG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책임투자 총괄이사. APG 제공

박유경 APG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책임투자 총괄이사. APG 제공

APG의 적극적인 주주행동은 연금 가입자들의 요구이기도 하다. 박 이사는 “기후위기 대응에 소홀하면 소송을 당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후위기로 재난이 닥쳐온다면 향후 연금을 받더라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유럽 연금 가입자들의 인식이라는 것.

실제 유럽에서는 연기금의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법적 대응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영국의 주요 연금펀드 중 하나인 대학교원연금(USS)의 가입자들이 '석탄투자를 계속하는 등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며 이사들을 고소했다.

앞서 APG는 한국전력의 국내외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투자에 계속 문제제기를 했는데, 변화가 없자 지난해 1월 보유지분을 모두 매각하는 결단을 내렸다. 지난해 10월에는 전 세계 투자기관모임인 ‘기후행동 100+(Climate Action 100+)’과 함께 2050탄소중립위원회에 석탄발전소 퇴출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APG는 앞으로도 ‘기후행동 100+’ 소속 금융기관들과 함께 차기 정부의 인수위원회에도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제언이 담긴 서한을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업들의 탈탄소 전환을 유도하려면 정부의 역할과 정책 변화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박 이사는 특히 “국내 제도상 주주총회에서 ESG 관련 권고적인 주주제안이 쉽지 않은데 이에 대한 개선을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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