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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 "日 정부, 사도광산을 정치 이용…외교문제로 변질"

입력
2022.02.16 16:58
수정
2022.02.16 18:0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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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히사토모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정부가 정치에 이용하고 외교 문제로 변질"
강동진 경성대 교수 "에도시대 이전의 사도광산 강조하는 건 강제동원 관련 역사 은폐가 주목적"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돼 일했던 사도(佐渡)광산을 일본 정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UNESCO)에 이달 1일 추천한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국제학술 토론회가 16일 열렸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비대면 방식으로 연 이날 온라인 토론회에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참석해 △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만으로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할 수 있고 △애초에 조선인의 노동은 강제노동이 아니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날 토론회는 비공개로 진행됐으나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해 발표문이 공개됐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에 따르면 사도광산은 1500년대 중반부터 금은 채굴 작업이 이뤄진 광산으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1,519명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일본이 패전할 당시에는 1,168명의 조선인이 강제노동 중이었다. 사도광산은 에도막부, 메이지 정부가 소유하다가 1896년 미쓰비시합자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1989년 3월까지 채굴이 진행됐다. 현재도 미쓰비시그룹 산하 골드사도가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

고바야시 히사토모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차장은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면서 대상 시기를 ‘에도시대’로 제한한 근거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2006년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시동을 걸었을 때만 해도 사도광산은 1596년에 발견돼 1989년까지 약 400년간 조업이 이어진 산업유산으로 주목받았다. 일본 정부가 초점이 바뀐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에서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갱도. 구불구불하고 좁은 에도시대 갱도와 달리 비교적 넓게 매끈하게 뚫려 있다. 사도광산에는 2,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에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역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을 검토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도광산을 대표하는 아이카와 금은산에서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갱도. 구불구불하고 좁은 에도시대 갱도와 달리 비교적 넓게 매끈하게 뚫려 있다. 사도광산에는 2,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태평양전쟁 기간 일제에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역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을 검토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바야시 차장은 “역사 전체의 설명을 피하고자 사도광산의 가치를 전통 수공업에 기반한 생산 시스템으로 한정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이는 일본 정부가 2015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1910년까지로 한정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던 꼼수와 닮았다”고 설명했다. 고바야시 차장은 이어서 일본 정부가 역사수정주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이 됐으면 좋겠다는 주민의 바람을 왜곡해 ‘역사 전쟁’ 등으로 부르며 정치에 이용하고 외교 문제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했다.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는 탄생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정확하게 설명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바우하우스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졸페라린 폐광산(독일) 근대 건축양식의 기법이 표출된 반 넬레 공장(네덜란드)을 예로 들면서 “특정 시기의 건축양식이 강하게 인지되는 세계유산의 경우에도 산업유산의 탄생에서 중지(소멸)된 현재에 이르는 전체 변천 과정에 대한 가치를 증명했고 입증받았다”라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일본 정부가 에도시대 이전의 사도광산을 강조하는 이유는 “메이지시대 이후의 변화에 대한 치명적 한계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제동원과 관련된 역사 은폐가 주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ICOMOS) 한국위원회 위원이다.

토론회에서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강제노동 부정에 대한 반론도 나왔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4월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한국인 동원은 강제동원(연행)이 아니며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에서 금지하는 강제노동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놨다. 한국인이 징용됐고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전시에 이뤄지는 징용은 합법적이었다는 주장이다. 또 국가는 징용에만 관여했을 뿐 당대에 이뤄진 ‘모집’ ‘관알선(관청을 통한 알선)’은 강제노동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강제노동을 ‘처벌의 위협 아래 강요됐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노동’으로 정의한 국제노동기구(ILO)의 판단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학계의 통설과도 충돌한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도 과거에는 모집과 관알선, 징용을 모두 강제동원으로 인정해왔다고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지적했다. 1997년 3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쓰지무라 데쓰오 문부성 중등교육국장이 교과서 검정과 관련해 답변하면서 “모집이라는 단계도 결코 임의로 응모한 것이 아니고 국가의 동원계획 아래 동원된 것으로 자유의사가 아니었다는 평가가 학설 등에 있어서 일반적”이라고 답변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 실장은 일본 정부가 ‘징용’을 국가의 책임 회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점을 고려해 한국에서도 징용이라는 단어를 주의해 써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사도광산 한국인 동원이 특별한 사례가 아니고 일본의 한국인 강제동원 정책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식민지배 및 한국인 강제동원 실태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사도광산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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