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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두시(杜詩)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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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음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의 한 권인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다. 책에 수록된 작품 해설의 첫 문장에는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단순한 번역을 넘어 현 세대와 조응하려는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에서의 ‘두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시를 뜻한다. 이는 역사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듯, 두보의 시 역시 과거의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현 세대의 고유한 관심사를 매개로 현재의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듯 문장을 해석하고 번역해야 한다는 의미다. 엊그제의 지나간 번역이 아닌 오늘, 현재의 번역을 하겠다는 이 기치에 나는 적잖이 감명받았다.
그것은 동시대성에 대해 고민하는 지점을 함께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동지애였다. 비록 분야는 다를지라도 우리가 하는 고민은 깊게 맞닿아 있다. 어쩌면 같은 범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번역문학이 과거의 원문을 현시대 감각에 맞추어 번역하는 일이라면 영화는 과거에 나온 원형 서사를 기반으로 현시대에 맞추어 변형하며 탄생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을 영화로 대입해 보자면, 엊그제의 영화가 아닌 오늘의 영화를, 오늘의 관객들에게, 오늘의 감수성으로 전달한다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관객 입장에서 얘기하면 최근 한국 영화의 경향은 다소 게으르다. 오스카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여주었고,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영화들이 제작과 개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당장에 인상적인 한국 영화 몇 편을 이야기하라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제작비와 다수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인 만큼 안정적 구조, 이미 흥행했던 전력이 있는 구조와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안전한 선택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지만, 정말 그것이 안전한 선택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엊그제 막을 내린 영화이지, 오늘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엇비슷하게 흥행작을 모방한다 하더라도 그 작품은 이전의 작품이 등장했을 때처럼 관객들에게 열렬히 빛나는 감동과 재미를 선사할 수 없다.
클리셰는 영화에서 양날의 검 같은 존재다. 사실 클리셰는 보편적 감정을 기초로 두고 있기에 이를 온전히 벗어나려다 보면 공감대를 놓칠 수밖에 없다. 나는 영화가 빚지고 있는 원형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안일하고 게으르게 영화를 만들다 보면, 관객들이 몇 번은 속아줄지 몰라도 앞으로는 영화 자체를, 극장을 찾는 행위 자체를 그만두게 되어버릴 것이라는 염려다.
코로나19와 OTT의 대두로 영화는 빠른 시일 내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어쩌면 이 위기가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이라도 위기감을 갖고 우리 시대의 오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관객들과 영화,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엊그제에 머물지 않고,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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