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6> 암사동,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
신석기시대와 함께 나타난 정착 생활은 현대문명에 이르게 한 인류의 집합적 발명이다. 한편으로는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의 팬데믹 역시 사람들이 정착해 모여 살면서 출현한 현상이다. 암사동은 한반도 안에서 정착 생활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마을 유적이자,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머나먼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 생활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유물은 토기다. 이동 생활 때는 토기 같은 물품을 제대로 간수할 수 없다. 한국고고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얼마 전 작고한 사라 넬슨(Sarah M. Nelson) 교수가 소개한 이후, 세계 고고학에서 신석기시대의 한반도를 설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유적이 바로 암사동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대표로서 회자되는 곳이다.
암사동, 서울의 동쪽 끝
서울 어디든 한강 남쪽 올림픽대로변은 아파트가 병풍처럼 서 있지만, 동쪽 끝 암사동 유적공원만은 푸른 소나무 숲속에 원시시대 고깔모양 집들이 복원돼 있어 '탈서울문명'의 낯선 풍광을 보여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변의 구릉 꼭대기에 있던, 오늘날 암사(巖寺, 바위절)로 불리는 백제시대 사찰 백중사(伯仲寺)에서 내려다보는 한강 모습은 아마 그때도 절경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명 학자인 서거정(徐居正)도 시를 통해 ‘산 모습이 물에 의해 끊어지고(山形臨水斷)...마음에 먼지가 저절로 사라진다(胸襟自不埃)’라고 읊고 있다.
백제시대만 해도 이곳이 서울의 중심지였다. 백제 왕성으로 보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부터 하남의 미사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백제시대 여(呂)자형 주거지들이 모래 땅 속에서 무수히 발굴된 것이 그 증거다.
1979년 사적 지정 후 조성된 암사동 선사유적 공원에는 8만㎡에 이르는 평평한 땅에 멋진 소나무숲이 복원된 움집을 덮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공원 조성 이후 심은 것들이지만 신석기시대 풍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멀지 않은 한강 나루 이름이 소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송파(松坡)였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 암사역에서 이어지는 도로변 정문 입구에 들어서니, 타원형으로 된 유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 실시된 발굴 현장을 보존해 전시하는 곳이다. 1970년대 초반에 발굴된 움집을 전시한 공간에서는 신석기시대 생활을 주제로 하는 실감형 디지털 예술영상전시를 볼 수 있다. 암사동 유적공원에서 86아시안게임의 성화를 채취했기 때문인지 일찍부터 정비가 잘 되어 박물관이나 전시관 말고도 공원 내 편의시설이나 어린이를 위한 체험교육공간이 많다. 가깝게 있으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소나무 그림자가 일렁이는 벤치에서 책을 읽고 싶은 곳이다.
대홍수로 드러난 빗살무늬 유적
유적 서쪽은 조선시대 중부내륙 교통의 요지였던 광나루가 자리한 천호동이다. 동쪽에는 암사가 있는 낮은 산이 강쪽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한강은 암사동의 응봉(鷹峯)과 광장동의 아차산이 양쪽의 벽처럼 서 있어서 하폭이 좁다. 이곳을 통과한 강물은 암사동 지역에서 넓어지게 되어 유속이 떨어져 강자갈과 모래를 쌓게 된다. 여의도나 미사리섬도 그러한 강 흐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하천퇴적 지형은 강의 흐름 변화에 따라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암사동은 제방 역할을 하는 올림픽대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매년 홍수 걱정을 하던 곳이었다. 신석기시대 풍요로운 마을의 재난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까지 지속되었던 셈이다. 을축년 대홍수(1925년) 때 이 지역이 침수돼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 그러한 과정을 보여준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등 일본 고고학자들이 이때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를 시베리아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사용하던 소위 캄 케라믹(Kamm-keramik, 독일어로 빗살무늬라는 뜻) 문화의 한 자락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했고, 오랫동안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기원이라고 생각되었다.
원조 빗살무늬토기의 수수께끼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지역에서 암사동 유적이 가장 오래된 연대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전형적 문양으로 장식된 토기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빗살무늬는 토기의 표면에 음각으로 길고 짧은 선들을 연속해서 긋거나 찍어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기의 아가리부분, 몸통부분 그리고 아랫부분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교한 문양을 넣은 것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다.
문제는 이러한 토기가 가장 오래된 층, 즉 6,000~7,000년 전의 층에서 나오고 그 이후 층에서는 문양의 면이 줄어들거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새로운 문화가 등장할 때는 엉성한 시제품이 나오다가 점차 정교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암사동 유적이 지속되는 적어도 3,000년 이상의 시간 속에서는 빗살문 양식이 정교한 것에서 엉성한 것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선사시대의 수수께끼다.
빙하시대 동안 지속된 구석기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언저리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는데 암사동의 신석기 유적이 나타날 때까지 거의 4,000년 동안 한반도 지역에는 뚜렷한 유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암사동 사람들의 출현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더구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일본이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적어도 1만5,000년 전에 토기가 나타난 곳이다.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정착촌들은 아마도 빙하시대가 끝나는 1만8,000년 전 황해 저지대에 흐르는 큰 강들에서 시작되었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에 오래된 토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수수께끼다. 빗살무늬토기 역시 지금은 바다가 된 황해 저지대의 큰 강변들에서 출현하고 발전하다 그 극성기에 암사동에 출현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추론이 사실이라면 황해 해저에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1만 년의 토기문화 공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후세 고고학도들의 숙제다.
암사동 사람들
암사동 유적에서 현재까지 44기의 신석기시대 움집 주거지들이 발굴되었다. 그래서 유적공원에는 고깔모양의 집들을 복원해 두었다. 평면이 원형인 것이 많고 대부분 중심에 불자리가 있고 움이 깊은 것을 보면 추운 겨울을 대비한 것 같기도 하다. 주거지들이 모두 한 시대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채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기적 홍수에 마을이 잠기면 아픈 마음을 안고 새롭게 집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토층전시관에서 볼 수 있듯이 수천 년 동안 깊이 5미터가 넘는 모래층이 쌓이기도 했던 것이다. 홍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지속적으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은 그만큼 먹거리 환경이 좋았음을 의미한다.
암사동은 강과 산이 연속해 있어서 선사인들이 안정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생태 환경이다. 그렇다고 해도 겨울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온갖 겨울용 먹거리들을 저장하느라 바빴을 것이고 움집 안 곳곳에 걸어두었을 것이다. 박물관 중앙영상홀에 복원된 움집을 보면서 섣달 긴긴 밤 불자리 옆을 지키며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는 암사인 가족들의 단란한 행복이, 휴대폰을 쳐다보고 사는 우리들의 저녁보다 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적에서 한강을 보고 싶다
한강은 암사동 신석기인들의 생명줄이었다. 수많은 그물추가 이들의 삶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지금의 올림픽대로는 벽이 되어 유적과 한강을 단절하고 있다. 유적공원에서 암사 선사인의 눈에 비쳤던 솔밭 사이로 한강이 반짝이고 샛강에서는 바람에 갈대가 일렁이는 풍경을 감상해볼 날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올림픽대로 위로 연결되는 암사초록길 공사를 보면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매년 10월 열리는 신석기축제에서의 세계유산 지정을 위한 시민들의 열정적 염원이 머지않아 결과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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