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캠핑과 주말농장은 도시 사람들의 흔한 낭만이다. 풀 향기, 흙 내음을 맡다 보면 주중의 고단함은 눈 녹듯 사라진다. 하지만 해 본 사람은 안다. 거처 없이 밥 해 먹고, 잠자고, 농사짓는 그 번거로움을. 캠핑의 먹방과 불멍은 짧고, 준비와 뒷정리는 긴 법이다.
경기 양평에 위치한 단독주택 '선집(대지면적 896㎡, 연면적 139.56㎡)'은 서울에 거주하는 건축주(48)의 주말주택이다. 그가 캠핑과 주말농장의 재미를 좀 더 편하게 누리고자 농사짓던 빈 땅에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작은 컨테이너를 갖다 놨으나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불편함이 너무 컸다. 임시 거처 말고, 5도 2촌(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생활하는 방식)에 필요한 든든한 전진기지를 짓기로 했다. 결과는 대만족. 토요일 새벽마다, 서울 집에서 40㎞ 떨어진 선집으로 '몸'만 향하는 발걸음이 이리 가벼울 수 없다.
중첩되는 안과 밖... 경계에 선 사람
집은 정면 왼쪽에 있는 공식 출입문 말고도 숨겨진 출입구가 있다. 맞은편 마치 나무 울타리같이 또는 건물의 벽으로 보이는 부분을 슥 밀면, 벽이 열리며 새로운 공간으로 안내한다. 집의 중심, 파이어피트(화덕)가 놓인 중정이다. 중정에 들어서면 바닥에 깔린 나무 덱을 따라 동선이 왼쪽으로 살짝 틀어지며 후정을 향한다.
설계를 맡은 김호중 오르트(OORT)건축사사무소 소장은 "건물의 일부로 보이는 펜스를 밀고 들어오는 행위가 바깥 세계에서 나의 세계로 넘어오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라고 생각했다"며 "중정에 들어오면 (후정으로 나가는) 방향을 살짝 틀도록 만들어 건축주가 이곳에서 잠시 방향을 잃는 체험을 하도록 의도했다"고 설명했다. 건축주가 낯선 공간에서 도시라는 익숙한 장소를 잃어버리도록 하는 건축적 장치라는 것이다.
집 곳곳에 설치된 이런 열리는 벽들은 실내와 실외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중정으로 들어와 또다시 집과 창고 사이의 벽을 밀면, 후정이 나온다. 벽이 열리고 닫힘을 반복하며 안은 곧 밖이 되고 밖은 다시 안이 된다. 침실 옆 발코니를 이루는 벽도 원한다면 열 수 있다. 건물의 여러 공간이 이처럼 가변적이다. 건축가는 "안과 밖을 끝없이 중첩시키면서 내가 경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자꾸 의식하도록 했다"며 "이를 통해 내가 사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인식적 사라짐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단단한 벽을 치고 안전한 내부를 만드는 서구의 건축과 다르게, 담양의 소쇄원처럼 들어열개(한옥에서 위쪽으로 들어 열게 된 문)를 열었을 때, 안과 밖이 사라지는 한국적 무(無)의 건축 철학을 담고자 했다고 한다.
주말만 이용하는 만큼 300평 가까이 되는 대지에도 실내는 약 30평으로 최소화했다. 관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다. 방 2개, 화장실 2개, 거실, 주방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 결코 단조롭지 않다. 거실 옆 방 1개는 미닫이문을 설치해 평소에는 거실의 일부로 쓰다가 상황에 따라 방의 기능을 한다. 유일하게 상시 방으로 쓰는 침실은 단차를 둬 다른 공간보다 위치를 다소 높였다. 단 8개의 계단이지만 집 안에 머무르는 이의 시선과 동선을 다채롭게 하는 효과가 있다.
땅에 고루 분포된 집... 나를 움직이게 하다
대부분의 건물은 사각형 형태로 디자인되고 대지의 중앙이나 외부 경계선에 붙여 배치한다. 그래야 공간 활용에 효율적이라고 여겨서다. 그러나 이 집은 좌우가 뒤바뀐 기역(ㄱ) 자 건물을 대지 가운데에 비스듬히 두는 전략을 택했다. 건축가는 "사람의 동선, 생활의 궤적이 한 군데 뭉치지 않고 다양한 경로의 선형을 이루도록 계획했다"며 "땅이 하나의 세계라면 세계 전체를 두루 돌아다닐 수 있게 디자인됐다"고 설명했다. "집을 지을 때, 휴대폰을 만들 때와 같은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게 건축가의 생각이다.
아파트에서 주로 살아온 건축주도 처음 설계안을 보고는 불편할까 내심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기우였다. "아파트는 열 발자국 안에 모든 공간이 다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안방에서 주방으로 가려면 계단을 내려와 거실을 거쳐서 한참 걸어야 돼요. 창고를 가려면 밖으로 나와 더 가야 하고요. 저도 이런 주거 형태는 처음인데 재미있고 늘 새로워요." 그가 이 집을 "나를 많이 움직이게 하는 집"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다.
건물을 중심으로 대지는 7군데 이상의 크고 작은 땅으로 쪼개진다. 덩그러니 놓인 넓은 땅보다는 이런 조그마한 여러 개의 땅들이 알차게 이용하기 좋다. 그는 "땅들의 위치와 빛의 방향이 서로 다 다르기 때문에 땅별로 정원, 산나물, 나무 등의 각기 다른 콘셉트로 실험하고 가꾸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찾은 나만의 휴식법
그는 집을 둘러싼 약 330㎡(100평)의 땅에 친구 두 명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회비 월 5만 원의 '양평 항아리' 모임이다. 거름도 사고, 모종도 산다. 올해는 수박과 참외를 한번 심어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건축주는 지난 몇 해 동안 웬만한 채소는 자급자족하고 있다. "집에서 먹는 건 다 심죠. 상추, 배추, 무, 파, 당근, 생강, 마늘, 옥수수, 고구마, 감자... 농약 거의 안 치거든요. 좀 못생겼지만 제가 직접 지은 거니까 깨끗한 농산물이라고 갖다 주면 와이프가 되게 좋아하죠."
1년 반 전에 지어진 이 집은 코로나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처음에는 집 짓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내도 마음 놓고 가족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좋아한다. 고1, 고3이라 주말에 더 바쁜 아이들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와서 푹 쉬다 간다. 건축주는 대개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새벽에 양평에 와서 차가 밀리기 전인 일요일 낮 12시 전에 서울로 돌아간다.
이런 생활은 주말도 주중만큼 고되다. 양평 집에 오자마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중정에서 '불멍'하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나면, 주중에 방치된 집을 관리하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다. 농사일이 바쁜 봄, 여름에는 더워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해서 오전 7시부터 밭일을 시작한다. 주말에 늦잠 자며 쉬고 싶지 않을까. "안 움직이고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아파트에 갇힌 것 같더라고요. 그냥 식물 가꾸고 풀 뽑고 하는 게 저한테는 쉬는 거예요. 땀 흘리고, 샤워하고, 시원하게 맥주 한 잔 마실 때 제일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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