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타령

입력
2022.02.08 22:00
27면
봄의 전령사 복수초는 급하다. 입춘도 훨씬 전인 1월 25일 전남 완도수목원 상왕봉에 활짝 핀 노란 복수초. 이른 봄꽃은 대개 잎이 나오기 전 알몸으로 핀다. 바람에 꽃가루가 잘 날려가게끔 방해가 되는 이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풀이나 큰 나무가 햇볕을 가리기 전에 수정해 번식하려는 생존 전략이다. 완도수목원 제공. 연합뉴스

봄의 전령사 복수초는 급하다. 입춘도 훨씬 전인 1월 25일 전남 완도수목원 상왕봉에 활짝 핀 노란 복수초. 이른 봄꽃은 대개 잎이 나오기 전 알몸으로 핀다. 바람에 꽃가루가 잘 날려가게끔 방해가 되는 이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풀이나 큰 나무가 햇볕을 가리기 전에 수정해 번식하려는 생존 전략이다. 완도수목원 제공. 연합뉴스

내가 지금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봄은 기어코 오고 있다. 24절기 중 첫 번째인 입춘(立春)이 지난 지 닷새 됐다. 입춘은 봄에 들어간다(入)는 게 아니라 봄이 들어선다(立)는 멋진 말이다.

겨우내 피고 진 베란다의 붉은 동백도 조금 지나면 이젠 나 몰라라 하겠다. 봄은 뒷산의 복수초 꽃망울에, 물오른 생강나무 가지에 숨어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겨울은 새봄을 잉태한 자궁이다. (내가 국어사전에서 가장 이쁜 단어라고 생각하는) 꽃샘추위가 가고 나면 봄은 입덧을 끝낸 새색시처럼 사뿐히 우리 곁에 다가올 터다.

요 며칠 할 일 없이 글자 '봄'과 '춘(春)'에 꽂혔다.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왜 '봄'일까. 우리말 '봄'의 어원은 정설은 없으나 볕의 뜻을 지닌 고어 '볻', 또는 불(火)의 옛말 '블'에 '옴(來)'이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고, '보다(見)'라는 동사의 명사형 '봄'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봄의 한자 '春'의 갑골문에는 풀(艸)과 해(日), 屯(진칠 둔) 자가 함께 그려져 있다. '屯' 자는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이다. 햇살을 받아 움이 트는 걸 형상화한 글자다.

그런 '春' 자의 성질을 빌린 단어가 의외로 많다는 게 놀랍다. 말만 들어도 가슴 뛰는 '청춘(靑春)'이 그중 으뜸이다. '춘추(春秋)'는 나이의 존칭이다.

사람도 자연이거늘, 봄의 성질은 어쩔 수 없이 인간 본성인 성정(性情)과 맞닿아 있다. 봄바람이 불면 움츠렸던 음(陰)과 양(陽)이 성(盛)한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들이 많다. 얼핏 생각만 해도 사춘기(思春期), 회춘(回春), 춘화(春畫), 매춘(賣春) 등이 떠오른다. 봄을 파는 게 몸을 파는 거라니, 이 단어만은 글쎄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있으니 그건 '춘정(春情)'이다. 이 시 하나면 설명이 족하겠다. '나/찾다가/텃밭에/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예쁜 여자랑 손 잡고/매화꽃 보러 간 줄 알아라' (김용택, '봄날' 전문)

춘정은 천기(天氣)다. 무릇 생명을 가진 것들이나 그렇지 않은 것들까지 다 깨운다. 사람도 땅도 강물도 나무도 꽃도 깨운다. 봄꽃은 실성한 듯 지천에 피어오른다. 코가 매큼한 도화 향기가 춘정을 꼬드기는데 자연과 한 잔 술로 수작(酬酌)하든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읊든 어찌 몸과 마음을 사리겠는가. 봄과 술은 내통하듯 자고로 최상의 술에는 '春' 자가 붙었다. 참 호사스럽고 낭만적이다. 중국의 주선(酒仙) 소동파가 즐겼다는 전설의 술 동정춘(洞庭春)이다. 우리나라에도 전라도 여산(익산)의 호산춘(壺山春) 등이 있다.

그 많던 '춘자(春子)'는 왜 사라졌을까. 봄이 오는 길목은 춘천(春川)이다. 새 학기에는 기타를 둘러메고 경춘선에 몸을 실었다.

봄만큼 시종 알뜰살뜰하게 즐기는 말을 많이 거느린 계절이 어디 있을까. 기다리고(대춘, 待春), 찾아가고(심춘, 尋春), 감상하고(상춘, 賞春), 희롱하다 보면(농춘, 弄春) 어느새 봄은 떠난다(송춘, 送春). 봄은 가고 나면 그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봄'이 붙은 우리말은 어떤가.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봄놀이' '봄마중' '봄처녀'다. 봄나물을 생각하니 '봄동'이 떠오른다. 참 앙증맞은 이름이다. 참기름에 버무린 아삭한 겉절이를 생각하니 군침이 돈다.

진짜 봄기운은 우수(雨水)를 지나 경칩(驚蟄) 후에 온다. 그 4일 후인 3월 9일이면 새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때쯤이면 방역수칙도 영업제한도 풀어지려나. '새봄'은 띄어쓰지 않는 한 단어다. 새봄은 부디 작년에 왔던 봄이 아니길. 새봄에는 우리 모두 스스로 봄길이 되어 걸어가기를. 내 안이 쓸쓸하고 고단하니 이렇게 봄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다.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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