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오후, 눈썰매를 탔다

입력
2022.02.04 22:00
23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 스켈레톤 선수로 출전한 강광배.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 스켈레톤 선수로 출전한 강광배.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 썰매 종목의 개척자인 강광배가 '루지'를 우리에게 선보인 건 1998년 나가노 올림픽 때였다. 하늘을 보고 누운 자세로 트랙 위를 내달리는 이 아찔한 스포츠가 동계올림픽 정식 종목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하기야 그 시절 동계올림픽을 기다리는 우리의 관심은 쇼트트랙 하나에 몰려 있었다. 1992년 알베르빌 대회에서 김기훈이 막판 스케이트 날 들이밀기로 동계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그는 1,000m 개인전과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이 대회 2관왕이 됐다)을 따고, 1994년 릴레함메르에서도 쇼트트랙에서만 6개의 메달을 쓸어 담았다. 그러니 빙판 위에 그려진 111.12m 트랙을 쌩쌩 도는 쇼트트랙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강광배는 나가노 동계올림픽 루지 경기에서 31위를 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없었다. 하지만 여러 명이 이 경기 장면을 기억했다. 묘하게도 어린 시절 지푸라기를 가득 채운 비료 포대와 고무 대야를 들고 언덕에 올라가 무서운 스피드로 눈밭을 내달리던 썰매놀이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추억만큼 강력한 촉매가 있을까. 촌에서 자란 이들에게는 매끈한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탄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경사진 눈밭에서 하던 갖가지 놀이, 해가 지고 난 후 달빛 아래 나가서까지 엎어지고 뒹굴며 놀았던 일은 온몸의 관절 마디마다 각인됐을 만큼 친숙하다. 감당하기 힘든 속도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하강하다 보면 저 아래 야트막한 무덤 두 개가 우리를 안온하게 받아주던 기억은 꿈속에까지 찾아들 만큼 압도적인 행복이었다.

강광배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때도, 2006년 토리노 올림픽 때도,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때도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2002년과 2006년에 엎드려서 썰매를 타는 스켈레톤 대표로 출전했던 그는, 2010년 밴쿠버에서 봅슬레이의 파일럿으로 변신했다. 그렇게 썰매 3종 경기 모두에서 국가대표로 뛴 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래서 2018년 평창올림픽 스켈레톤에서 윤성빈이 금메달을 따고, 4인승 봅슬레이 대표팀이 은메달을 땄을 때도 나는 강광배의 선한 눈빛을 먼저 떠올렸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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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되지 않은 코로나19와 숱한 정치적 이슈들 속에서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개막했다. 유쾌하지 않은 사안들로 인해 바짝 쪼그라든 느낌이지만, 올림픽을 기다리면서 어떻게든 이 축제를 기념하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했다. 마침 고향 집에 머물던 설 연휴에 푸짐한 눈이 내렸다. 그칠 기미도 없이 날리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던 조카들에게 제안했다. 밖에 나가 눈썰매를 타자고.

창고에 처박혀 있던 눈썰매들을 꺼내 3단으로 조성된 텃밭 꼭대기로 올라갔다. 올림픽 경기장 부럽지 않게 근사한 눈썰매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 지현이는 루지, 규환이는 스켈레톤, 나랑 윤하는 볼슬레이 방식으로 썰매를 타는 거다." 100m 넘게 이어진 눈밭에서 자빠지고 미끄러지면서도 우리는 쉼 없이 언덕에 올랐다. 왁자한 웃음 사이로 등줄기에 땀이 차오르는가 싶더니 몇 달째 시들하던 육신이 새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만 시름 내려놓고 신나게 노는 것만큼 신묘한 보약은 세상에 없다. 그 당연한 섭리에 기대 나는 설날 오후를 통째 눈썰매 놀이에 바쳤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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