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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넘치던 젊음의 시부야는 '옛말'... 돈 냄새만 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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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도쿄 시부야(渋谷)역을 벗어나면 거대한 스크램블 교차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 번의 보행 신호에 많게는 1,000여 명이 북적거리며 길을 건넌다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횡단보도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수백 명이 일제히 교차로로 쏟아져 나오는 진풍경은,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TV 뉴스나 영화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근처에는 10년을 하루처럼 오매불망 주인을 기다렸다는 충견의 동상도 서 있다. ‘하치코’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견공의 동상 앞은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는데, 늘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휴대폰이 잘 안 터질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시부야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젊은이의 문화가 꽃피었던 이곳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그러고 보니 90년대 중반의 첫 일본 여행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거리도 시부야였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었지만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는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일본행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구입한 가이드 책자의 한 구석에 소개된 ‘만다라케’라는 만화 전문 서점에 호기심이 동했다. 숙소에 도착한 뒤 냉큼 짐을 풀고 그 이색적인 가게를 찾아 나섰는데, 그곳이 바로 시부야였다. 그때만 해도 아키하바라(秋葉原)는 컴퓨터 전문점이나 가전 제품 양판점이 밀집해 있는 밋밋한 상점가였던 반면, 시부야는 패션, 음악, 만화, 애니메이션 등 아기자기하고 기발한 ‘일본풍’ 대중 문화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번화가였다. 일본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해외 마니아라면 꼭 들르는 순례지이기도 했다.
사실 시부야가 젊은이 문화의 메카로 자리 잡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1970년대부터 역 근처에 패션 전문점과 백화점 등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최신 유행에 민감한 젊은 유동 인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관이나 공연장, 전시장과 라이브 하우스, 카페나 술집 등 대중문화를 즐길 수 있는 크고 작은 상업 시설들이 속속 생겨났고, 어느 사이엔가 개성 강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문화를 소비하는 해방구로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 소위 ‘갸루’(ギャル、젊은 여성을 뜻하는 영어 단어 ‘걸 girl’의 일본어 표기) 패션이 이곳에서 싹텄다. 금발 머리에 짙은 화장, 짧은 교복 스커트에 일명 ‘루즈 삭스’라고 부르는 헐렁한 양말을 종아리에 걸친 불량스러운 여고생 룩이다. 짙은 색 파운데이션을 얼굴 전체에 어둡게 칠하고 눈과 입술 등은 밝고 화려한 색으로 대비를 준 그로테스크한 화장 스타일도 갸루 패션의 일종인데, 한때 한국에서 개그의 소재로 희화화된 적도 있다. 꼭 갸루 패션이 아니어도 시부야에서는 기이하고 자유분방한 용모를 한 젊은이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어서, 그저 거리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던 기억이 있다. 또, 시부야는 대형 CD숍이나 레코드점, 실용 음악 학원, 라이브 하우스, 클럽 등 대중음악과 관련한 가게나 시설도 밀집한, ‘음악의 거리’였다. 대중적인 유행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인디 뮤지션들이나 개성 강한 디제이들의 활동 무대이자, 다른 나라의 전통 음악이나 전위적인 퓨전 장르 등 폭넓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폭넓은 문화적 수용력을 특징으로 삼는 대중음악 장르를 ‘시부야 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음악 장르의 정체성으로 인지될 만큼 시부야 거리의 문화적 존재감이 컸던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시부야의 가장 큰 매력은 어수선함과 기발함 속에 숨어 있는 다양성과 개성에 있었다. 작고 허름한 갤러리에서 젊고 당돌한 아티스트의 전시회가 열리는가 하면, 대여섯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라이브 바에서 즉석에서 잼 세션(뮤지션들의 즉흥 합주)이 벌어진다. 대로변에는 현란한 불빛으로 방문객을 유혹하는 대형 유흥업소가 성업 중이지만,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지갑이 얇은 젊은이들도 호쾌하게 맥주 한 잔을 시킬 수 있는 값싼 선술집들도 줄지어 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고급스러운 취향과 저속한 대중 취미, 세련됨과 조악함이 공존하는 잡종적 분위기야말로 시부야 문화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활력 가득한 창조력의 원천이었다.
2010년대 이후, 도쿄에 재개발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시부야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반 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건물이나 노후한 기반 시설을 쇄신해야 한다는 의견은 꽤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는데,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해외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최신 랜드마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었다. 민간 부동산 회사나 건설 기업이 주도한 대규모 재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된 것이다. 스크램블 교차로 주변에는 최신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고, 구글 등 글로벌 기업이나 스타트업 벤처 기업들이 이들 건물에 입주하면서 ‘IT 비즈니스 타운’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생겼다. 새로 유입된 소비 계층은 지갑 사정이 넉넉한 만큼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고급 인테리어 잡화점이나 세련된 레스토랑 등이 앞다투어 자리 잡았고, 거리 한쪽에는 현대식 편의 시설을 갖춘 공원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돈은 없지만 취향은 독특한 젊은이들의 놀이터가 점점 사라졌다. 오랫동안 시부야 문화와 함께해 왔던 기발한 패션 전문점이나 개성 강한 편집숍, 작은 라이브 하우스, 저렴한 선술집 등도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대기업이 투자한 최신식 상업 시설은 불경기에도 버틸 수 있지만, 적은 자본으로 돌아가는 소규모 가게는 여력이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유동 인구가 줄어들면서 소규모 가게들이 영업에 어려움을 겪다가 폐점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시부야가 ‘돈 냄새가 풀풀 나는 멋진 거리’로 다시 태어나기는 했지만, 예전의 시부야 거리에서 느끼던 매력과 개성은 빛 바랬다. 오랫동안 시부야의 문화적 역동성을 지켜보아 온 한 명으로서 그런 변화를 보는 심경이 복잡하다.
재개발 프로젝트와 토박이 지역 문화를 둘러싼 논쟁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못지않게 다양한 재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고, 원래 살던 주민들의 삶의 기반이나 문화를 훼손한다는 비판도 자주 제기되었다. 서울만 해도 훤칠한 최신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오래된 거리의 외양이 멀끔해진 거리가 많다. 정작 그곳을 걸어 보면 예전의 아기자기하고 정겹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오히려 아쉬움이 생긴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천편일률적인 대형 상업 시설을 짓기 위해 지역의 개성과 멋스러움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렸다는 생각에 도리어 속이 상할 때도 많다.
옛 시절의 오래된 감성을 세련된 것으로 해석하는 ‘레트로’ 감성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예전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수구적인 사고 방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이나 시설은 새로 정비하는 것이 마땅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싹트고 자란 토박이 문화를 온전히 평가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충분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문화 유산의 중요성마저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와 동일시되는 자본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서로 다른 다양한 주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오고 만들어 온 지역의 문화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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