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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日 전략외교 격전지 된 베트남… ‘수교 30주년’ 韓 변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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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한 국가의 외교 기조는 국제사회의 방향성에 민감하게 영향받기 마련이다.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1986년 개혁과 개방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베트남의 '도이머이 정책'이 대표적이다. 베트남은 "이념에서 벗어나 살길을 도모하겠다"고 결심했고, 또 절박했다. 서로를 알아본 것일까. 이후 한국과 베트남 양국은 1992년 12월 22일 국교를 정상화하며 정면에서 마주 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년, 이제 두 나라는 경제 영역에서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됐다. 싼 노동력과 지리적 인접성을 갖춘 베트남은 한국의 최대 생산기지로, 한국은 산업 인프라가 부족한 베트남에 누적 외국인직접투자(FDI) 1위 국가로 자리 잡았다.
손익계산만 따지자면, 경제교류의 이득은 한국이 더 많다. 지난해 베트남은 한국의 3위 수출국이자 5위 수입국이었으며, 한국은 베트남과의 교역을 통해 280억 달러의 흑자를 봤다. 여기에 베트남에서 1차 조립돼 한국으로 역수입된 후 전 세계로 최종 수출되는 완성품의 수요까지 감안하면, 경제분야 국익에서 베트남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베트남은 한국 FDI를 통해 산업 체력을 키우고 자국민의 고용 안정성을 보장받고 있다. 여기에 한·베트남 과학기술연구원(VKIST) 등을 통해 한국 기술을 전수받는 기회도 얻었다. 한국은 현재를, 베트남은 미래를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셈이다.
심화된 경제 관계는 양국민의 삶 또한 바꿨다. 현재 한국에는 7만7,000명의 노동자를 주축으로 18만여 명의 베트남인이 뿌리를 내렸다. 같은 기간 베트남에도 주재원 등 15만여 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베트남댁'으로 불리는 10만여 명의 결혼이주여성들은 이제 한국 문화의 한 부분이 됐고, 베트남 최대 명절인 구정(뗏) 차례상에는 한국의 빵과 과자가 기본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양국의 우호 관계는 수교 30주년 행사들을 앞둔 최근 뚜렷한 실금이 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 한국 국적기를 일방적으로 회항시킨 사건을 기화로 한국 내 반베트남 정서가 짙어지더니, 베트남 당국의 지나친 봉쇄 정책으로 현지 추가 투자를 꺼리는 한국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현재로선 베트남 말고 한국의 글로벌 생산기지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 우려는 끼어들지 못한다. 당연히 국적기 회항이 지방실무자의 단순한 실수였고, 수 차례 베트남 중앙정부가 피해 당사자와 한국기업에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30년 공든 탑은 생각보다 빠르게 균열되고 있다.
의심과 불신이 쌓이는 한국 쪽과 달리, 미국과 일본은 무섭게 베트남으로 진격하고 있다. 중국과 사회주의 형제국가로 별도의 소통 창구가 있는 데다, 인도차이나 중심 국가로 역내 여론을 주도하는 베트남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여기에 탈중국화를 위해 베트남으로 자국 기업들을 신속히 남하시킬 필요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베트남이 좋아서가 아니라, 친해져야 할 실리가 명백하다는 얘기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지난해에만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등 행정부 핵심 인사들을 네 차례나 베트남으로 보냈다. 이들이 베트남에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쿼드(Quadㆍ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 안보협의체)에 베트남이 협조하라, 그러면 중국과 갈등 중인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돕고 경제교류도 확대하겠다." 미국은 새해 들어서도 대중국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조각인 베트남을 반드시 쿼드의 틀 안에 귀속시키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 역시 미국을 따르면서 자국의 경제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자국 기업인들과 친분이 깊은 팜민찐 총리를 매개로 양국 관계 격상을 위해 전력투구 중이다. 스가 요시히데 전임 일본 총리의 첫 해외 순방지도,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를 취임 이후 처음으로 초대한 국가 역시 베트남이었다. 양국은 올해 일본 대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확대하고, 베트남이 절실히 원하는 해군력 강화를 위한 협력도 본격화할 예정이다.
중국은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응수하고 있다. 미일과 가까워지는 베트남을 향해 국경무역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도,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위한 별도의 외교협상 테이블을 동시에 제안하는 식이다. 하노이 외교가 관계자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수성하려는 중국의 의지를 고려할 때, 베트남이 미일 측의 구애를 거부하는 반대급부로 받을 선물들은 더 크고 강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미일과 중국, 어느 쪽이 베트남을 선점할지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다. 다만 미중 갈등 장기화가 불가피한 상황을 고려하면 베트남의 전략적 가치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하다.
실제로 지난해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EAS)가 동남아 여론 주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4.6%가 미중 갈등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베트남을 꼽았다. 2위는 일본(40.6%), 3위는 유럽연합(5.7%)이었다.
미중일의 '베트남 공들이기'가 가속화하고 있지만 한국이 당장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한국은 쿼드의 일원이 아니며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직접적 이해관계국도 아니다. 완전한 중립은 어려워도 한쪽 편에 반드시 서야 하는 처지 또한 아니다. 일각의 전문가들은 베트남에 관한 한 적절한 등거리 외교나 원칙에 기반한 입장 표명 정도면 아직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경제산업 관점에서도 이미 가동 중인 한국기업의 베트남 생산시설이 일방 철거되거나 타국에 양도될 일 역시 없다. 불필요한 반베트남 정서를 걷어내고 양국 우호의 틀을 지켜내는 것, '수성(守成)'에 충실하면 당장 큰 손실은 보지 않는다.
문제는 미래의 국익 유지 여부다. 지난 30년은 철저히 양국의 경제교류가 외교 및 안보 영역을 이끄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로서 베트남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이상, 경제 분야 독점은 어려워지고 타 영역에서 영향력 또한 약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에 현지 외교가에선 한국이 수교 30주년을 기점으로, 베트남과의 양자외교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할 것을 가장 먼저 주문하고 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 인도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베트남은 외교관계 격상 여부를 보수적으로 접근해 왔다.
새롭게 떠오른 경제안보 등의 협력 확대도 한국이 받아 든 과제다. 코로나19 창궐과 요소수 부족 사태 등에서 확인됐듯이 보건 및 경제안보 확보는 국제사회에서 생존의 영역이 됐다. 베트남은 한국보다 백신 개발의 역사가 길고, 기초 필수 자원도 풍부하게 보유한 국가다. 한국 정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올해 양국 경제부총리 회의를 3년 만에 현지에서 열고 한·베트남 보건백신 공동위원회를 발족한다.
최원기 국립외교원 아세안인도연구센터 책임교수는 "더 이상 한국은 기존의 경제교류에만 안주해선 안 된다"며 "베트남과의 전략적 관계 격상 및 확장을 통해 미중의 새로운 격전지가 될 메콩 지역의 다자외교와 동남아에 대한 거시적 정책조율 수준 또한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행히 강대국의 '러브콜' 속에서도 한국에 대한 베트남의 애정은 식지 않은 모습이다. 베트남 중앙정부는 현재 한국 정부의 외교관계 격상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물론, 경제 등 비(非)전통 안보 협력 확대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우호의 조건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뉘앙스는 숨기지 않는다. 베트남 최고 권력자인 응우옌푸쫑 당서기장은 이와 관련 지난해 12월 전국외교회의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뿌리가 단단하지만 가지가 유연한 대나무처럼, 베트남은 앞으로 전통을 계승하면서 외교와 세계문화의 진보를 선택적으로 흡수하겠다." 한국과 베트남의 30년 우정은 지금 새로운 도전과 변화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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