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다 망가진 농부 이효리 vs 술꾼도시댄서 이효리

입력
2022.01.30 09:00
티빙 '서울 체크인'
MBC 떠난 김태호 첫 신작

관찰 예능 '서울 체크인'에서 무대 밖(왼쪽)과 무대 위 이효리의 모습. 티빙 캡처

가수 이효리만큼 삶의 1부와 2부가 다른 이가 있을까.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단 10분이면 충분하다고 당당하게 노래('텐미닛')하던 핀업걸은 2013년 결혼한 뒤 삶의 궤적을 180도 틀었다.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간 그는 요가와 다도에 빠져 살며 마음 챙김을 한다. 밭에서 직접 키운 콩을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추념식에 참석해 시 '바람의 집'을 낭송하기도 한다. 이효리가 이렇게 낯선 제주살이를 단층처럼 쌓아갈 때, 많은 사람은 그의 삶에서 새 무늬를 발견해갔다. 1998년 그룹 핑클로 데뷔한 이효리가 느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쫓으며,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데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찰 예능 '서울 체크인'에서 이효리는 엄정화에 "언니는 언니 없이 어떻게 버텼어요?"라고 묻는다. 가수 활동을 하며 겪은 어려움을 다독여 줄 선배 없이 어디다 하소연을 하며 살았느냐는 얘기다. 티빙 캡처


" 화려? 자연?" '도덕경'이 묻는 이효리의 본성

"요즘에 '도덕경'이란 책을 봐요. 일어나서 어떤 챕터를 딱 펼쳤는데, 그 내용이 본성에 따라서 사는 삶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그게 맞는 삶이라는 거예요. 화려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런 걸 좋아하는 게 나의 본성인지 자연에 묻혀서 사는 게 내 본성인지 헷갈려요, 이제."

29일 국내 OTT 티빙에서 공개된 '서울 체크인'에서 이효리가 그의 선배 엄정화에 털어놓은 속마음이다. 올해로 제주살이 9년 차에 접어든 이효리에게 서울은 이제 '체크인' 해야 하는 장소다.

장소가 달라지면 많은 게 함께 변하기 마련. 이효리는 서울에서 다시 진한 화장을 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탈색한 뒤 카메라 앞에 선다. 무대에서 일하는 이효리는 서울에서 제주에서와 정반대의 삶을 산다. 그 시소 타기에 이효리도 흔들린다. 그리고 이 삶의 방향이 과연 맞는지를 체크한다. '서울 체크인'은 바로 이 지점에 현미경을 갖다 댄다. 극단의 공존이 확대되는 순간, 이효리는 더 낯설게 보인다. 김완선은 "왜 이렇게 손톱이"라며 이효리의 손톱을 보고 깜짝 놀란다. 만남 하루 전, 이효리가 '엠넷아시안뮤직어워즈(MAMA)' 시상식에서 보여준 빈틈없이 매끈하고 화려한 모습과 딴판 이어서다.

'서울 체크인'에서 모인 한국 여성 댄스 가수 어벤져스들. 왼쪽부터 이효리, 김완선, 보아, 엄정화, 화사. 티빙 캡처


"더럽죠?" "불가사리만 보다가" 제주댁의 돌발 발언

카메라에 잡힌 이효리의 손톱은 죄다 뭉툭하다. "더럽죠? 제가 개 키우고 농사짓다보니까요." 이효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제주로 내려가 산 주변에 둥지를 튼 이효리가 꾸준히 네일숍에 들러 반짝 윤이 나고 긴 손톱으로 단장하고 산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상경한 이효리는 여의도의 유명 백화점에 들른다. 제주에서 가져온 '무릎 나온' 운동복 대신 외출복을 사기 위해서다. 제주엔 백화점이 없어 결혼 후 처음 가는 백화점 나들이라고 했다. 그런 이효리의 입에선 해녀 같은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제주도에서 불가사리만 보다가 '불가리(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보니까". 도시 이방인이 된 이효리가 입버릇처럼 "신기하다"며 내뱉은 서울 체험기는 그렇게 웃음의 땔감이 된다.

'서울 체크인'에서 이효리가 '엠넷아시안뮤직어워즈'에서 합동무대를 꾸린 후배 댄서들에 꽃과 손편지를 직접 전달하고 있다. 무대를 빛내 준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티빙 캡처


"40~50대 롤 모델 없어" 나이듦에 뜨겁게 반응하는 이유

'서울 체크인'은 여성들의 나이 듦을 삭제하지 않는다.

"너무 늙어 내 얼굴 보기 싫은 거예요" "(눈주름 가리려) 눈 주위에 당기는 거(스티커) 붙여야 한다고 스타일리스타가 얘기하는 순간부터 그렇게까지 당겨야 하나 싶더라고요" "(대기실) 밖에서 하하 호호하는 소리 들리고 다 바뀌었는데 나만 그 자리에 있는 거 같은 거에요.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처럼 혼자 늙으면서. 되게 기분이 이상했어요 진짜" "내가 그 기분을 모를 것 같아?"

이효리와 엄정화는 이렇게 서로의 나이 듦과 그로 인해 느끼는 사회적 외로움을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보듬는다. 블랙핑크와 에스파 등 요즘 K팝 아이돌그룹에 이젠 무대를 내준 '술꾼도시댄서들'의 이야기에 온라인엔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이효리와 엄정화가 공유하는 깊고 너른 이해의 영역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술렁. 방송 대기실에서 내내 느꼈던 외로움을 말하며 '언니 이거 알까'로 말을 시작하고,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그걸 모를 거 같아?'로 대답하는 이 상황들이 괜히 뭉클'(@yiminh*****), '엄정화는 50대고 이효리는 40대잖아. 둘 다 20~30대 무대를 휩쓸고 다니던 사람들이고. 그런 여자들이 40~50대가 되고 삶이 바뀌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보여주는 게 너무 중요한 거 같아. 지금의 우리에겐 그 나이대 여성 삶의 샘플(?)이 너무 없으니까'(@flto****), '이효리가 엄정화에게 한 '언니 없이 어떻게 버텼냐'는 말 넘 와닿는다. 우리 회사 대졸 여성 직원을 본격적(?)으로 채용한 게 나 때부터였고, 보고 배울만한 여성 선배 없이 스스로 헤쳐나가야 했다. 하다못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참고할 선배도 없었지. 같이 입사한 여성 동기들은 1년 만에 2/3가 그만두고, 남은 여자들은 거대한 남성들의 성벽 밖에서 버티고 싸웠다. 비장해 보이지만, 정말 그랬다. 남자들은 나를 보며 '여자답지 않게 잘한다'고 시혜적으로 평가했었지'(@onl****) 등이다.

여성들이 40~50대가 돼 어떻게 유리천장으로 둘러싸인 사회에서 고꾸라지지 않고 서서히 내려올 수 있는지를 들려주는 여성들의 서사가 그간 너무 소거된 데 따른 갈증의 표현이다.

'서울 체크인' 포스터. 티빙 제공


"시선이 없으니 자유로워" '언니'들의 이야기

'서울 체크인'은 무대를 휘저었던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K팝 여성 어벤져스'들을 불러 모아 마이크를 쥐여준다. 보아는 무대 공포증 얘기를 꺼냈다. "어릴 때는 그냥 진짜 무대가 무서웠고, 일본에 쇼케이스(새 앨범 홍보 행사)를 갔을 때 정말 심하게 망쳐서 그때부터 무대가 무서웠다"며 "그래서 '나는 이만큼 해야 돼'란 압박의 공포가 생기더라"고 했다. 열네 살이던 2000년 데뷔해 일본에서 K팝 한류를 이끈 보아가 품어왔던 마음 속 흉터였다. 보아의 고백에 엄정화는 눈물을 훔친다. 어려서 견뎌야했던 스포트라이트의 중압감 그리고 꾸준히 '일'을 하는 것의 어려움은 네 여가수의 공통 화제였다. 이효리는 김완선에 "사람들의 시선엔 스트레스 안 받으세요?"라고 묻는다.

"별로 시선이 없어 자기야. 이제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더 자유로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니까. 내 놀이로 하자, 이런 생각이거든. 누구나 취미가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나 자신도 좀 단단해지는 것 같아."

김완선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마돈나'는 그의 말처럼 단단해보였다. 제작진에 따르면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 등이 함께 한 여성 댄스 가수 모임은 즉흥적으로 이뤄졌다.

김태호 PD가 지닌달 '2021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놀면 뭐하니?로 올해의 예능프로그램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MBC 제공


이효리와 쌓은 신뢰... 김태호 변화의 시작

김태호 PD는 최근 MBC를 떠난 뒤 첫 작품으로 '서울 체크인'을 내놨다. 김 PD는 이효리와 MBC '무한도전'에서 게스트 출연으로 인연을 맺고, '놀면 뭐 하니?'에서 '싹쓰리'와 '환불원정대' 프로젝트를 잇달아 진행하며 신뢰를 쌓았다. 김PD는 "이효리가 제주 생활로 낯설어진 도시인 서울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로웠다"며 "그 안에서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위로 받고 이를 극복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힐링을 줄 것 같았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서울 체크인'은 공개 당일 바로 티빙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이효리의 격의 없는 모습과 '언니'들의 익살스럽고 때론 지혜로운 삶의 대화를 보고 듣다 보면 75분이 후딱 지나간다. 김PD는 유재석이 아닌 이효리와 손을 잡고, 버라이어티가 아닌 관찰 예능으로 변화를 줬다. 미션도 없다. 김PD 특유의 '부캐 놀이'에 피로감을 느낀 시청자라면, 머리 비우고 편히 볼 수 있다.

김 PD는 1회, 파일럿으로 '서울 스케치'의 출발선을 끊었다. 그가 MBC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시도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20여 년 동안 예능을 제작해온 작가는 "방송사였다면 유재석을 놓치지 않으려 각 방송사 간판 PD를 유재석 프로그램에 붙였을 테고, 직장인인 김PD도 회사의 뜻에 따라 유재석 외의 카드(인물)를 생각하기 어렵고, 도전을 하기엔 분명 제약이 따랐을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김 PD가 앞으로 어떤 새 인물과 긴 호흡이 아닌 쇼트폼 콘텐츠를 지속해서 내놓느냐가 홀로서기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PD는 10여 명을 모아 제작팀을 이미 꾸렸고, 독립 법인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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