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와 태아 누구를 먼저..." 임신 암환자 치료는 언제나 고통스런 선택

입력
2022.02.08 17:00
25면

<50> 허대석 내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20대 임신부가 호흡 곤란, 발열, 어깨 통증 등 증세를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다. 임신 때문에 생긴 증상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양쪽 목에 혹 같은 것이 만져지자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조직 검사한 결과, 불행하게도 악성림프종이었다. 흉부 CT를 촬영해보니, 대동맥 앞쪽 종격동에 생긴 직경 10㎝의 종양이 기도를 압박해 호흡 곤란을 유발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악성림프종은 항암제가 주된 치료다. 그러나 환자는 31주 차 임산부다. 종양이 기도를 막아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환자의 상태만을 생각하면, 즉시 유도분만을 실시해 출산을 한 다음 항암제 투여를 해야 했다. 그러나 환자는 아기가 혹시라도 미숙아 상태로 태어나 여러 위험을 갖게 될지 걱정하면서, 출산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했다. 결국 의료진은 본인의 생명보다 태아의 안전을 더 걱정하는 산모의 심정을 고려해, 일단 항암제를 한 차례만 투여한 뒤 3주 후 유도분만을 하는 것으로 산부인과와 의견을 모았다.

태아에 미칠 수도 있는 나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항암제에서 위험한 약제는 뺐다. 나머지 항암제들도 용량을 줄여서 투약했다. 항암치료를 받은 후 환자는 호흡 곤란 증세가 완화돼 퇴원을 했지만 16일쯤 경과한 시점에 다시 상태가 악화했다. 태아의 움직임도 달라지고 조기출산 의심증세가 나타나자 환자는 곧바로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종양이 커진 건 아니었다. 응급실 검사소견상 치료 전과 비교했을 때 종양의 크기는 확실히 줄어 있었다. 문제는 심각한 폐렴이었다. 폐렴은 항암치료의 부작용 중 하나인데, 환자의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쉽게 세균감염이 발생한다.

임신 34주째 되는 시점이었다. 출산을 더 늦출 수는 없었다. 산부인과 의사의 판단으로 유도분만이 시도됐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체중은 2.37kg에 불과했지만, 다행히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했다. 환자도 의료진도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출산을 마쳤고 환자의 폐렴도 호전됐다. 그로부터 한 달 후 3주 간격으로 6차례의 항암치료가 시행됐고, 그 결과 종양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환자는 더이상의 항암제 투약 없이 규칙적으로 병원을 방문해 정기검진을 받았다. 종양 진단 1년쯤 되던 날, 정기검진차 병원에 온 환자는 아기가 돌이 되어 감사하다고 떡 한 박스를 진료실로 가지고 와 돌리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렇게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 실시했던 PET(전신 양전자단층) 촬영검사에서 재발 소견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임신상태를 고려해 항암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 재발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재발은 환자나 가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재발 사실을 통보해야 하는 의료진들에게도 큰 고통이었다.

환자는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을 아기를 떼어 놓고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재발한 림프종 치료를 위해 1차 치료 때 사용하던 항암제와는 다른, 2차 항암제 치료가 시행됐다. 다행히도 종양이 소실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재발 방지를 위해 말초혈액에서 본인의 조혈모세포를 채취하여 보관해 두었다가 고농도 항암제 치료를 받은 뒤, 그 조혈모세포를 다시 주입하는 자가조혈모세포이식술을 시행했다.

첫 발병 후 이제 7년이 흘렀다. 더 이상 재발은 없었다. 현재 환자는 무병상태다. 정기검진을 올 때마다 함께 오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의료진으로서는 큰 보람이자 기쁨이다.

임신부에게서 암이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암이 발생하면 불행한 결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암 때문에 생긴 신체의 변화를 임신으로 인한 것으로 오해하고, 암이 진행된 후에 의료기관을 찾아와 늦게 진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모뿐만 아니라 태아에 대한 문제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항암제 치료를 하기도 어렵다.

산모에 발생한 종양 자체가 태아에게 직접적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문제는 산모가 받아야 하는 항암치료다. 대부분의 산모들은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진단되기 때문에 항암제 치료가 필수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 치료 결정은 정말로 어렵다. 부작용이 없이 효과만 있는 항암제는 없고, 또 항암제가 암 환자인 산모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도 전달되어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환자처럼 산모와 태아가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태아는 엄마의 자궁 속에 최대한 머무르다가 적어도 34주를 지나서 세상에 나오는 것이 가장 좋은 반면, 산모는 하루라도 빨리 항암치료를 받아야 완치 가능성이 높아진다.

진료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태아와 산모, 과연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둔 치료법을 선택하는가의 갈등이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엄마와 태아 모두 귀한 생명이기에 그 선택은 언제나 눈물과 고통 속에 이루어진다.

전 서울대병원 암센터소장

전 서울대병원 암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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