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서울 거주, 30대 직장인, 1인 가구.
세 가지 키워드로 그의 주거 형태를 유추해 보자. 대개가 원룸, 오피스텔, 다가구 주택, 빌라, 아파트 그 어디쯤을 떠올릴 테다. 단독주택은 후보 중 제일 먼저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집을 구할 때 공동주택이 기본값이 된 건 그게 자산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서다. 또는 아파트 숲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른다.
이서현(33)씨가 사는 서울 서대문구 단독주택 '만끽(대지면적 43㎡, 연면적 48.64㎡)'은 그런 면에서 발상부터 모험이었다. 공들여 인테리어를 해도 얼마 안 가 집을 비워줘야 하는 뜨내기 생활에 지칠 무렵, 그는 '내 집 마련'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그도 '영끌'한 돈에 맞춰 서울 외곽의 빌라 매입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 가격에 이 집을 사는 게 맞나'는 회의감이 들었고, 그럴 바에야 그 돈으로 나에게 딱 맞는 집을 짓자고 결심했다. 직장 때문에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온 지 9년. 5곳의 원룸과 오피스텔을 거친 끝에 만난 그의 여섯 번째 집, '비스포크 하우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1985년 지어진 집, 신축 대신 '증축 대수선'으로
집은 안산 자락, 13평 남짓한 대지에 자리한다. 1층 8평, 2·3층 5평 정도로 3개 층을 합해 약 18평 규모다. 1985년에 지어진 단층 집을 대수선(1층)하고, 증축(2·3층)했다. 해당 지역은 자연경관지구라, 원래 있던 집을 헐고 신축하면 더 낮은 건폐율을 적용받아 실내 면적이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건축주는 기존 집의 1층 면적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신축 대신 증축 대수선을 결정했다.
그래도 워낙 작은 땅인 데다, 증축 대수선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우려가 컸다. 어려운 과제였지만 협소주택 경험이 많은 건축사사무소에서 흔쾌히 수락해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심인희 AAPA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협소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크기라기보다는 상대적인 크기"라며 "이만한 공간이라면 건축주가 원하는 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씨가 일본의 주거 문화를 경험한 것도 작은 집을 짓는 데 용기가 됐다.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굉장히 작은 집에서 많이들 살고, 저도 살아봤는데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일본에서 제 호스트 패밀리였던 분과 아직 연락을 하는데, 이만한 크기 집을 지었다고 하니까 '4인 가족도 살 수 있는 집'이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작은 집을 설계할 때 관건은 층별 공간 배치다. 층을 기준으로 기능을 달리하는 각 실이 나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층이 거실과 주방, 2층이 드레스룸 겸 욕실, 3층이 침실로 계획됐으나 막판에 욕조가 빠지며 1층이 거실과 화장실, 2층이 주방, 3층이 침실로 변경됐다. 이씨는 "3층에서 일어나, 2층에서 물을 마시고, 1층에서 씻고 옷 갈아 입고 집을 나선다"며 "생활 동선에 맞춰 공간을 배치해 층간 이동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곡선 벽면의 유리블록
집 외부와 내부 곳곳은 곡선과 아치로 이뤄져 있다. 건축주가 좋아하는 공간에 곡선이 많은 것을 보고 건축가가 반영해 설계했다. 특히 골목 모퉁이 쪽으로 나 있는 건물 모서리의 곡선은 집의 인상을 한층 부드럽게 만든다. 건축가는 "단층 집이 있던 좁은 골목에 3층짜리 건물이 올라갔다는 점을 감안했다"며 "집이 뾰족한 모서리로 땅을 가득 차지하기 보다, 둥근 곡선처럼 골목에 원만하게 녹아들고 지나가는 사람을 배려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집 안팎에서 가장 특징적인 공간은 1층의 곡선 벽면을 타고 가로로 넓게 펼쳐진 유리블록이다. 건축주는 채광이 좋은 집을 원했다. 다만 1층에 창을 낼 경우 사생활 침해가 우려됐다. 그래서 건축가가 제안한 게 유리블록이다. 유리블록을 사용해 외부의 시선은 차단하면서도 빛만큼은 받아들이게끔 했다. 건축주는 오후 3시쯤 거실 소파에 앉아 "유리블록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기 좋아한다.
집에서 가장 넓은 단일 면적을 차지하는 공간은 주방이다. 계단을 빼면 4평 정도의 공간에 오븐부터 식기세척기까지 구비했다. 원룸은 공간 구획이 안 돼 있다 보니 요리 한 번 하면 집 전체에 냄새가 배 불편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2층을 온전히 주방으로만 쓰고 창을 많이 내 환기에 신경 썼다. 2층은 문과 벽이 없고 1층과 2층의 면적 차이로 발생한 발코니와 연결돼 있어, 이 집에서 개방감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요리할 맛 나는 주방 덕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횟수가 크게 줄었다. 그는 주방에서 차를 마시거나 요즘 빠져 있는 천연 발효 베이킹을 하며 시간 보내기를 즐긴다.
내 생활을 '만끽'하는 집
지난해 8월, 이 집으로 이사 온 뒤부터 그는 재택 근무를 해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 3층 침실 한 쪽에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아 일하다 고개만 들면, 북쪽에 난 창에 가득 들어오는 안산이 그림과 같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산의 정취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산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잖아요. 1층 유리블록으로 쏟아지는 햇빛이나 3층 창 밖의 산을 멍하니 바라볼 때마다 '역시 여기로 오기를 잘했어'라고 생각해요."
직전까지 살았던 시끌벅적한 홍대 오피스텔과 달리 이 집은 "무서울 만큼 조용하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는 "타인의 소음에서 해방됐고 내가 소음을 일으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든든한 이웃들도 생겼다. 공동주택에 사람은 더 많이 살았지만 이웃과의 교류는 없었다.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음식을 나눠 먹고 안부를 묻는 이웃들이 생겼다. "이 집 덕에 동네가 밝아졌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주택 살이는 좀 더 신경 쓸 게 많지만 이조차 달갑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근처 빌라 지하 주차장의 '월 주차'를 찾아내 주차 공간을 마련했고, 구청 소식지를 열심히 챙겨 보며 요일별 분리 배출 같은 중요한 정보를 확인한다. 공동주택에서만 살아온 그는 난생 처음 올 겨울 구청에서 날라온 '동파 방지법'을 꼼꼼이 읽었다. 그는 "전에는 투표할 때나 그 동네에 산다는 것을 자각했다면, 이제는 내가 이 동네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더 자주 느낀다"며 "이 집에서 오래 살면서 언젠가는 1층에 나만의 작은 가게를 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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