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속 대통령의 덕목

입력
2022.01.26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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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여성팀 줄다리기 승리 비결 포용성
다양한 목소리 배제 말고 존중해야 생존
말 잘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게 중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줄다리기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줄다리기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중 줄다리기에서 노인(일남)과 여성 3명이 포함된 기훈 팀은 건장한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상대 팀을 보고 절망한다. 그때 노인이 “줄다리기는 작전을 잘 짜고 단합만 잘 되면 힘이 모자라도 이길 수 있다”고 읊조린다. 쓸 데 없는 소리란 비판이 나왔지만 기훈은 “얘기라도 들어보자”며 발언 기회를 준다. 노인의 전략대로 두 발을 11자로 놓은 뒤 줄을 겨드랑이에 낀 채 눕는 자세를 취한 기훈 팀은 예상을 깨고 버티는 데 성공한다. 다시 힘이 빠지면서 패색이 짙어질 때 이번엔 서울대를 나온 상우가 딱 세 발만 앞으로 가 상대 팀을 넘어뜨리자고 제안한다. 이번에도 반대가 있었지만 기훈은 “해봅시다”라는 말로 힘을 실어 준다. 결국 한 몸처럼 움직인 기훈 팀은 모두 살아남는다.

이 장면은 다양한 구성원의 작은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을 때 조직의 역량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누구의 의견도 묻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기훈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청할 줄 아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의 포용성은 기적을 만든다.

생사를 거는 건 대선 줄다리기도 다를 바 없다. 승리를 위해 후보가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은 적잖다. 어떤 이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중요하게 보고, 다른 이는 확고한 국가관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우선한다. 능력을 중시할 수도, 인품을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잘 듣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린 이미 ‘듣지 않는 대통령’을 뽑았을 때의 대가를 잘 알고 있다. 나라가 망할 뻔한 적도 있다. 1997년 외환 위기의 그림자가 엄습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 부총리와 수석의 다급한 보고도 한 귀로 흘렸다. 아들 현철씨가 수감된 뒤론 시계만 쳐다봤다는 게 관계자들 증언이다. 결국 우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고, 국민들은 연쇄 부도와 대량 해고를 감내해야 했다.

지난 5년도 힘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건 다른 목소리는 외면한 채 무능마저 독선으로 덮으려 한 오만 때문이다.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 수요가 커 공급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진작부터 나왔지만 똑같은 색깔로만 구성된 청와대는 이를 듣지 않았다. 갑자기 세금과 규제를 강화하면 오히려 매물만 잠겨 집값이 더 뛸 것이란 지적도 무시되긴 마찬가지였다. 세입자를 위한다는 임대차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세입자가 될 것이란 우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용국가를 외쳤지만 전혀 포용적이지 않았던 정치의 결과는 참담하다. 지역에 따라 10억 원도 넘게 뛴 아파트 가격에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무너져 버렸다. 열심히 일해도 평생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인구절벽과 지방소멸은 현실이 됐다. 이러한 분노가 결국 정권 교체 여론으로 이어졌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후보들의 과거와 됨됨이를 볼 때 세종대왕처럼 훌륭한 지도자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인다. 국민들도 성인이나 영웅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딱 하나, 다양한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포용적인 대통령을 꿈꾸는 마음은 크다. 성별과 세대로, 이념과 빈부로, 내 편 네 편 나누기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껴안으려 노력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반대쪽에 선 이들의 얘기도 경청할 줄 알고, 그들도 똑같은 국민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선 줄다리기에서, 험악해진 국제정세 줄다리기에서, 미래 혁신과 일자리 전쟁이란 줄다리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비결도 결국 잘 듣는 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남의 외침은 현실화할 수도 있다. “이러다 다 죽어.”

이재명(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8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2022년 소상공인연합회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8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2022년 소상공인연합회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뉴시스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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