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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정치, 추락 지성

입력
2022.01.24 19:00
25면
H.M. 콰이터트 '모든 것이 정치이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의 영문 번역본 표지

H.M. 콰이터트 '모든 것이 정치이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의 영문 번역본 표지

1984년 출간 즉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제는 그 제목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유명한 책이 '실패의 본질'이다. 현지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한국에는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제명으로 나왔다.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자료를 조사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의 요지는 태평양 전쟁의 도발에서 패전까지 일제(日帝) 군부가 보여준 어리석은 판단과 결정을 사례와 함께 열거하고, '실패'의 배후에는 무엇이 작용하고 있었는지 분석하고 있다.

'일본군의 조직론적 연구'라는 부제에 걸맞게 조직이나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유익한 충고가 많다. 압축해서 정리하면 일제 군부에는 대략 다음 같은 문제가 있었다. 단기적 결전 사고, 귀납적이고 경험에 의존하는 전략 책정, 집단주의 네트워크, 개인 중심 통합 관행, 동기를 중시하는 평가 체계 등이다. 부언하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부는 정치적으로 세 개의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는 연구 결과까지 있으니 그들의 파멸은 필연이었다.

'실패의 본질'과 같이 보면 좋은 책이 어빙 재니스(Irving L. Janis)의 'Groupthink'이다. 역서는 없지만 '집단 사고'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관련 분야에서는 교과서로 통하고 있다. 이 책은 "정책 결정과 실패의 심리학적 연구"라는 부제가 있는데, '일본군의 조직론적 연구'와 대조해 보니 동전의 앞뒤처럼 느껴졌다. 책에 따르면 실패로 가는 집단 사고의 징후로는 취약성이 없다는 착각, 선택적 합리화, 자기 집단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 외부에 대한 고정관념 등의 8가지가 있다고 한다.

집단 사고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모든 회의에 의무적으로 반론자를 지정하고, 필히 중립적 입장을 가진 전문가에게 평가를 받는 등의 몇 가지 제도를 상시 운용하라고 충고한다. 어빙 재니스의 말대로 조직이나 집단이 스스로 내부 반론이나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면 다행인데, 그게 또 말처럼 쉽지가 않다.

톰 니콜스(Tom Nichols)의 '전문가와 강적들(원제 The Death of Expertise)'에 따르면, 특히 요즘 들어 불거진 문제는 "나도 너만큼 알아!"라고 외치는 문외한들이 넘친다는 점이다. 말마따나 종편은 연예인 가십부터 방역 정책과 세계 정치까지 꿰는 두루뭉술 전문가 천지고, 포털은 과시욕에 들뜬 사람들이 쏟아내는 궤변과 막말로 넘친다. 지적 나르시시즘과 배타적 평등주의에 기반한 검색 지식은 전문 지식을 말살하고 있다.

설상가상, 한국은 별별 전문가 코스프레로 권력을 추수하는 분들이 대학가와 각종 단체에 즐비하다는 리스크가 추가된다. 청와대가 강행한 인사의 상당수가 사달을 내고 도중하차했던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요새는 때가 때인지라 허다한 정치 낭인이 전문가로 둔갑하고 여야를 넘나들며 여의도를 활보한다. 저급한 실력과 후안무치, 곡학아세를 겸비한 분들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지성에 대한 염증과 불신이 커지고 있다.

이런 풍조가 고착되면 천신만고 끝에 진짜 전문가를 모신다고 해도,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팽배한 '반지성'의 흐름 안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없다. 한국이 선진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진영 논리의 초병이 되고 권력의 홍위병이 되어야 영달하는 정치권의 문법부터 사라져야 한다.

광우병 난리가 기억에 생생한데 미국 쇠고기 최대 수입국이 한국이라는 최근 기사를 읽고 생각나는 책 한 권이 있다. '모든 것이 정치이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H.M 콰이터트)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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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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