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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비핵화

입력
2022.01.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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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러시아군 장갑차들이 지난 18일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의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크림반도=AP연합뉴스

러시아군 장갑차들이 지난 18일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의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크림반도=AP연합뉴스

러시아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핵과 묘한 인연이 있는 나라다. 옛소련 시절인 1986년 북부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전 폭발은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로 꼽힌다. 수도 키예프에서 불과 100여㎞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이 참사 이후 우크라이나가 원전 건설을 중지한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에너지난을 감당 못 해 다시 원전 건설에 나섰고 지금은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원전에 의지한다.

□ 체르노빌 사고 5년 뒤에는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에 있는 핵무기가 주목받았다. SS-19, SS-24 등 사거리 1만㎞가 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이에 장착하는 550kt급 수소폭탄 등 당시 우크라이나 보유 핵폭탄은 1,240발에 이르렀다. 당시 보유량 기준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핵 비확산을 명분으로 미국과 러시아 등 기존 핵 보유국들은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도록 압박했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도 비슷한 처지였다.

□ 두 나라는 순순히 응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망설였다. 동부와 남부의 러시아 위협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핵은 가졌지만 운용 시스템이나 유지·보수 능력이 없었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쐐기를 박은 것이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다. 미국, 러시아, 영국, 우크라이나 정상이 서명하고 뒤에 중국, 프랑스도 동의한 이 각서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이전하면 독립과 주권을 보장하고 무력행사나 위협, 경제 제재를 하지 않는다는 안전보장 약속이었다.

□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병합으로 이 약속은 이미 공수표가 됐지만 러시아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침략한다면 휴지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가 간 약속을 짓밟는 러시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훼손될 위협 앞에서 고작 러시아를 향해 "본 적 없는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는 미국도 딱하다. 핵 폐기의 대가로 주어진 국제적 안전보장이 이처럼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것이라면 비핵화 협상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해야 할까.

김범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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