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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편지 유감

입력
2022.01.14 22:00
수정
2022.02.04 12:54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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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강소천의 동화 '해바라기 피는 마을'은 국민학교 시절 몇 번이고 즐겨 본 작품 중 하나다. 읽을 때마다 눈물 펑펑 쏟아 내던 이 특별한 동화에 감명받아 나는 해바라기 씨를 우리 집 장독대 주변에 빙 둘러 뿌렸다. 주인공 정희는 사변 때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국제시장에 난 큰불로 인해 엄마까지 여읜 고아다. 그런 정희를 위해 끝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육군 소위 '김철진'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남성 이름이었다.

12월 초, 각급 학교 단위로 진행되는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행사가 돌아올 때마다 피아노를 즐겨 치던 김철진 소위를 생각했다. 작품 속 정희가 그랬듯이 온 정성을 쏟아 상상 속 '김철진 소위'에게 편지를 썼다. 저금통 털어 산 크리스마스 실을 동봉하고, 책장 사이에 넣어 말려 두었던 단풍잎도 붙였다.

국민학교 6학년 가을이었다. 나보다 훌쩍 크고 예쁘장한 옆 반 여자아이가 운동장 옆 공작대 사이를 후닥닥 가로질러 교사(校舍) 뒤편으로 뛰어갔다. 얼마간 간격을 두고 군복 입은 남자가 아이를 따르는 게 보였다. 불안하던 친구의 눈동자를 통해 이상징후를 감지했던 것 같다. 운동장에서 육상부 아이들을 지도하던 선생님에게 달려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마디 떼기 무섭게 체육복 차림의 선생님이 내달렸다. 선생님을 따라가 건물 모퉁이를 돌아보니 저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군인에게 손목 잡힌 채 울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호루라기를 불며 선생님이 다가갔을 때 군인은 담장 사이 쪽문으로 내뺀 뒤였다. 작년 겨울 위문편지를 보내면서 가을 소풍 때 찍은 사진을 첨부했는데 이후 여러 달 동안 군인의 수상쩍은 편지가 계속됐다는 거다. 그러다 오늘 학교까지 찾아와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종용했다며 친구는 펑펑 울었다. 고작 열두 살 아이였다. 내 마음속에 간직해오던 '김철진 소위'의 이미지도 그 순간 와장창 깨졌다.

그런 일이 영 드물지 않다는 건 고등학교 가서 알았다. 1학년 담임이던 교련 선생님이 위문편지를 쓰는 우리에게 당부했다. '자칫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중하게 쓰되 사적인 감정이나 친절은 가급적 드러내지 말 것.' 따라서 나와 몇몇 친구는 '국군장병님께 올립니다'로 시작해 '강추위에 건강 잘 보살피시기를 기원합니다'로 끝나는 드라이한 문장을 교과서 베껴 쓰듯 편지지에 옮겨 적었다.

이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생활사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는 '쥐잡기 캠페인' 혹은 '멸공 포스터'처럼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역시 오래전에 용도 폐기된 과거의 유산이라고 여겼다. 요 며칠 떠들썩하게 불거진 논란을 보며 내가 아연했던 건, 논란 자체가 아니라 여전히 여고생들에게 위문편지를 강제하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20대 창창한 나이에 강제징집된 군인들은 백번 격려받고 보상받아야 한다. 다만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공공이 책임지고 감당할 일이다. 게다가 여학생들에게 강제하는 '위문편지 쓰기'는 쓰는 이의 부담뿐 아니라 '귀한 우리 아들'인 군인들을 잠정적 범죄자로 상정하기 쉽다는 맥락에서도 가중처벌받아야 마땅하다. 이름에서부터 불온하고 야릇한 군국주의 냄새마저 풍기는 이 행사를 이제 그만 박물관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이곳과는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린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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