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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약에 중독된 딸, 경찰서를 들락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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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된 큰딸이 20대 때부터 복용한 다이어트 약에 중독됐습니다. 상태가 나빠지면 집을 나가 무전취식, 절도를 저지르는 일이 몇 년째 반복되고 있어요.
큰아이가 다이어트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5년 전쯤이었습니다. 쇼호스트를 준비하면서 살을 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더군요. 못 먹게 해도 소용 없었고 나중에는 제 지갑에서 돈을 가져가거나 집에 있는 귀금속, 가방 등을 팔아 약을 샀어요.
처음에는 불안해하거나 자다가 소리를 질렀는데 시간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더니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트렁크 하나 들고 3~6개월간 가출해 떠돌면서 물건을 훔치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계산하지 않은 채 나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돈 없이 네일아트를 받고 택시를 타고 다니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호관찰을 조건으로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어요. 그런데 또다시 가출을 하면서 보호관찰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교도소에 1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딸 아이의 학창 시절은 평범했습니다. 남편의 유학 생활로 초등학교 저학년을 미국에서 보냈고 음악성이 뛰어나 악기를 전공했어요. 얼굴도 예쁘고, 활발한 성격에, 말도 잘했습니다. 중학생 때 왕따를 당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고등학생 때는 서울로 혼자 레슨받으러 다니며 입시에 집중했고 수도권에 있는 음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한 학기를 다니고서는 저 몰래 다음 학기 등록할 학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와인바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그때 친해진 가게 사장이 아이 이름으로 제2금융권에서 1,000만 원을 대출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랜드피아노를 사는 데 필요하다며 돈을 빌려달라 했다고 해요. 애가 둘인 나이 많은 남자를 사귀기도 했습니다. 취업할 때가 돼서는 쇼호스트를 준비했는데 한 곳에서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고배를 마셨습니다.
남편은 사회 활동이나 대인 관계가 활발하지 않아요. 아이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화가 나면 욱해서 손찌검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눈치가 없다'며 유난히 큰딸에게 히스테리가 심했고, 특히 애한테 뭘 먹이는 걸 유독 싫어했어요.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아침에 밥 먹여 보내려고 하면 '살찌게 뭘 그렇게 먹이려고 하느냐'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아이는 교도소에서 나와서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집에 무전취식으로 벌금형을 통보받은 우편물이 20개 정도 쌓여 있어요. 다이어트 약도 가방에서 다시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중에 아이 병명이 지적자폐성정신장애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판받을 때 아이를 상담했던 의사 선생님 판단인 것 같아요.
딸은 모든 치료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방에서 혼자 깔깔 웃기도 하고 누가 옆에서 괴롭히는 양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자의 입원이나 동의 입원은 불가능할 것 같고, 요즘은 인권 문제로 강제 입원도 어렵습니다. 박사님, 아이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요.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박지영(가명·61·주부)
지영씨,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기 삶을 꾸려나가야 할 시기에 병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고 답답하실까요. 가뜩이나 마음고생도 심한데 자꾸 범죄에 연루되니 뒷수습까지 하느라 감당하기 더 힘드실 거예요. 지영씨 딸은 지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집중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다이어트 약에 만성 중독된 게 발병의 여러 요인 중 가장 큰 원인으로 보입니다.
별도로 보내주신 딸의 진단서를 보면, 약물로 유발된 정신병이라고 돼 있습니다. 환자를 대면하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서면으로 살펴봤을 때 제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딸이 복용한 약은 펜터민 성분으로 4주 이내 단기간 처방하며 장기간 사용하지 않게 돼 있는 약입니다. 강한 정신적 의존성을 유발할 수 있고 심각한 사회적 기능장애와 연관될 수 있어요. 딸이 복용한 다이어트 약은 중추신경계를 자극해서 식욕을 떨어뜨리는 기전을 갖습니다. 사람이 산에서 갑자기 맹수를 맞닥뜨렸을 때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조성해 식욕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거예요.
딸은 이 약을 고용량으로 장기간 복용해, 지금 기분이 지나치게 고양돼 있는 상태로 보입니다. 기분이 고양돼 있다는 게 꼭 기분이 좋은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마치 풍선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가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감정이 과도하게 팽창돼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 별것 아닌 일에도 감정 조절이 안 되면서 화를 내고 분노가 폭발합니다. 항상 흥분된 상태로 잠이 안 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요구하고, 돈을 펑펑 씁니다. 주변 사람들과 사소한 일로 자주 다투기도 하지요. 증상이 심해지는 계절이 있을 수 있어요. 더 심해지면 환청이 들리기도 하고 망상이 생기기도 하지요. 현실검증력이 떨어지면서 판단력이 약화해 절도 같은 범죄도 저지르게 됩니다.
해당 약에 만성 중독되면 불면, 자극 과민성, 조현병과 유사한 정신 이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현재 딸의 상태와 매우 유사합니다. 딸은 집중적이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정신과 치료가 시급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와 함께, 딸의 원활한 치료를 돕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다이어트 약을 왜 이렇게까지 복용하게 됐을까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보내주신 자료에 딸의 성장과정, 중요한 사람과의 경험, 본인의 감정과 생각 등이 담겨 있지 않아 내면을 잘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심스럽게 이해를 해보려고 합니다.
딸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태도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신체에 대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지영씨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딸의 몸무게에 대해 언급하며 '날씬함'을 강조했어요. 딸은 이럴 때마다 굉장히 힘들고, 상처받고, 불편하고, 헷갈렸을 것 같아요. 자식은 부모가 자기가 어떤 모습이든지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지요. 반대로 외모, 학업과 같은 잣대로 아이를 재단하기 시작하면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부모는 신체 자아상이 성립될 시기에 자녀의 키, 몸무게, 외모에 대한 언급은 피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칭찬도 과하면 나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인이 돼서도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공부하라고 닦달하고 점수, 성적으로 소통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평생 시험을 보고, 어딘가에 합격하거나 눈에 보이는 성공을 해야만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느낍니다. 그보다는 성실한 모습, 노력하는 태도, 긍정적인 성격처럼 아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좋은 부분을 칭찬해 주는 게 좋습니다.
딸이 대학 입학 후 겪은 어려움은 대인 관계에서의 문제 해결 능력이 다소 부족한 것과 연관 있어 보입니다. 일단 딸이 자폐성향을 동반한 지적장애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보입니다. 지적장애가 있을 경우 대학 입학까지의 과정이 그렇게 순탄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발병 전부터 사회성이 미숙한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얼굴도 예쁘고 활발하고 말도 잘해서 처음에는 인기가 있는 것 같지만, 사회적 관계에서 눈치껏 단서를 포착하고 편안하게 의사소통을 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면 의미 있는 관계를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맺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지요. 입시에 매달리느라 이런 어려움이 가려져 있다가, 고등학교와 달리 정해진 틀이 없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굉장히 외롭고 사랑과 정이 고팠겠지요.
그러니 와인바 사장처럼 상대가 조금 잘해주면 홀딱 넘어가 사기를 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쇼호스트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도 '살 때문에 떨어졌다'고 실패 요인을 잘못 짚고 살 빼는 것에 집착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단서를 파악하고 처리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사회성이라고 정의한다면, 딸은 이런 단서를 잘 포착하고 민첩하게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것 같아요. 쇼호스트처럼 순발력이 뛰어나고 상호작용이 많은 직업을 원했던 것도, 자기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가족만이라도 딸과 매일 대화를 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딸은 사회성이 부족한데 약물 중독으로 이런 경향이 더 심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오해할 여지가 없는 짧고 명확한 대화가 적합합니다. 상징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행간을 이해하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따뜻한 관심을 녹여 일상에 대해 물어봐 주세요. '뭐 먹고 싶어, 네가 먹고 싶은 거 해줄게' 혹은 '우리 딸이 잘 먹어야 건강하지, 엄마가 사랑한다'와 같은 말들이 좋습니다. 거창한 주제보다는 수면, 날씨, 의식주와 관련된 사소한 주제나 딸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져주는 따뜻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세요.
물론, 대화를 한다고 해서 딸의 정신병 증상이 좋아지진 않습니다. 딸은 입원을 시켜서 전문의가 제대로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하지만 당장 입원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딸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도울 사람은 곁에 있는 가족밖에 없습니다. 질병의 증상에는 개인의 인생, 사회, 시대가 반영돼요. 딸은 증상이 심해지면 집을 나가버리죠. 어떤 사람은 상태가 나빠지면 집에 웅크리고 있는데, 딸은 집을 나갑니다. 이런 양상은 증상을 가진 본인이 집을 불편해하고 어렵게 느낀다는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치료는 의사들의 몫이지만 딸이 집을 조금 더 편안하게 느끼고 마음을 누그러뜨려 병원 문턱을 넘게 만드는 데에는 가족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당장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기 어렵다면 부모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만나 딸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의논하는 방안도 권합니다. 전문의와 상의해 증상의 악화 요인과 징후를 파악하고, 일상에서 딸을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면 도움이 되실 거예요. 전문의와 함께 그때그때 가장 도움이 되는 의사 결정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영씨, 암도 치료가 되는 세상입니다. 치료를 받으면 딸이 지금보다 많이 좋아질 거예요. 고통스럽고 힘드시겠지만, 가족들이 따뜻한 말로 딸의 닫힌 마음을 계속 두드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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