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분광학과 광기술 분야를 연구하는 고재현 교수가 일상 생활의 다양한 현상과 과학계의 최신 발견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알기 쉽게 조망합니다
최근 전 지구적 규모의 기후 위기와 탄소 중립 이슈 앞에 다양한 환경친화적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열렸던 소비자가전쇼에서도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기술과 제품들이 선보였다. 이 중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국내 한 기업이 발표한 '배터리 없는 리모컨'이다. 리모컨은 보통 TV 등의 전자제품에 적외선을 보내 작동을 시키기에 에너지원이 꼭 필요하다. 통상 전원으로 사용하던 배터리를 리모컨에서 빼면 어디에서 에너지를 얻는단 얘긴가?
이 기업의 아이디어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변환해 전원으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주위 공간을 가만히 둘러보자.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뭐가 있을까? 우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나 조명등이 내리쬐는 빛이 있다. 이 빛은 사물의 표면에 부딪혀 일부가 흡수되고 나머지가 반사되며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리모컨 정도의 면적에 달린 태양전지로 떠도는 빛을 흡수해 전기에너지로 바꿔도 우리의 생활엔 하등의 지장이 없다. 태양전지를 이용한 충전으로 일회용 배터리를 제거한 에코 리모컨은 작년에 등장한 바 있다.
활용 가능한 또 다른 에너지원으론 방안을 돌아다니는 각종 전자기파가 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지금도 열심히 신호를 나르는 방송용 전파, 블루투스 신호, 휴대폰과 중계국을 연결하는 5G나 LTE 신호, 그리고 와이파이 공유기에서 나오는 신호 등 다양한 전자기파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신호들에다 빛까지 포괄하는 전자기파는 보편적인 파동 현상 중 하나다. 수면파가 물의 출렁거림을 동반하고 음파가 공기의 진동으로 전달되듯이 전자기파는 전기적 속성과 관련된 전기장, 자기적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장이 진동하며 1초에 약 30만㎞에 달하는 광속으로 날아간다. 가령 2.4GHz의 와이파이 신호라면 전기장과 자기장이 함께 1초에 24억 번 진동하며 광속으로 신호를 실어 나른다.
에코 리모컨으로 불리는 새로운 방식의 리모컨은 와이파이 공유기에서 방출되는 신호를 낚아채서 전기를 만든다. 전자기파를 이루며 끊임없이 진동하는 자기장이 전선을 지나가면 전선에는 전류가 유도된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기장이 전기를 만드는 '전자기 유도' 현상은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기본 원리면서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무선 충전기의 원리이기도 하다. 보통 충전대에 들어 있는 전자석이 교류의 자기장을 만들면 휴대폰이나 전동칫솔 속에 있는 코일이 이를 받아 전류로 바꾸는 것이다. 에코 리모컨이 하는 역할도 이와 정확히 같다. 단 충전대에서 만드는 자기장 대신 방안을 떠도는 와이파이 신호 속 자기장을 이용한다는 점만 다르다. 이를 모두 적용하면 낮에는 주로 빛을 이용해 리모컨을 충전하다가 빛이 없는 밤에는 와이파이 신호로 충전할 수 있다.
물론 미약한 와이파이 신호로는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충전할 정도로 전기를 만들 수는 없다. 리모컨처럼 저전력 소형 기기의 충전에만 활용할 수 있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리모컨에 들어간 후 결국 폐기물로 나오는 엄청난 수의 일회용 전지를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소규모 전원을 구축하는 기술들이 속속 등장할 것이다. 그런 기술은 빛이나 전파 신호를 에너지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신체의 움직임이나 온도의 차이 등 생활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에너지로도 전기를 만들 수 있다. 에너지 소모의 절대량을 억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변의 다양한 에너지원을 이용한 전원의 확보로 전지처럼 막대한 양의 폐기물이 되는 소모품을 줄이는 것도 미래 세대를 위해 중요하다. 국내 기업들이 첨단 기술뿐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 친화적 기술에서도 세계를 선도해 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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