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자유로운 집이여 오라'… 힘없는 이들에 던지는 희망의 몽상 [다시 본다, 고전]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의 '공간의 시학'은 집에 관한 책이다. 제목만 보면 저자가 건축가이거나 시인이라고 추측할지도 모르지만, 바슐라르는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철학자이자 과학사가다. 가난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중등학교 과학 교사로 근무하다 43세에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바슐라르는 집념은 무척 강했지만 타인의 말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과학사 강의에서 한 학생으로부터 강의에서 다루는 세계가 살균되어 있다는 불평을 듣고 존재론적 충격에 빠졌다. 그날 그는 자신이 그동안 왜 불만족스러웠는지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송태현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 재인용) 그 뒤로 바슐라르는 문학적 몽상으로 가득한 책을 쓰게 된다.
공간을 다루는 이 책엔 거리나 공원, 카페나 상점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여러 종류의 집이 나온다. 폭풍과 한파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작은 오두막집, 새들이 사는 새집, 연체동물의 집인 조개껍데기, 서랍과 상자와 장롱과 구석. 서랍은 작은 사물들의 집이고 상자는 비밀들의 집이며 장롱은 내의와 잘 말린 이불들의 집이다. 그렇다면 구석은?
슬픔에 빠진 아이는 늘 구석에 가서 웅크린다. 겁에 질린 동물들이 찾는 곳도 구석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이 들 때 우리는 구석으로 숨는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구석이야말로 안전에 대한 몽상을 충족시켜 주는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편안하게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상처받은 순간에 숨을 수 있고 비밀의 은신처가 될 수 있어야 하니까. 어쩌면 집이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이 시적 정의에 반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집이 안전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욕설과 폭력은 없었다고 해도 상처 없이 유년을 보내는 운 좋은 아이는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떠난다. 자신의 진정한 집을 찾아. "태어난 집에 대립하여 이번에는 꿈꾸는 집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삶에서 때늦게, 그러나 물리칠 수 없는 용기로써 우리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이루지 못한 것을 이제 이루리라. 집을 지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새집이나 조개껍데기 같은 집을 짓기를 꿈꾼다고 말한다. 새집은 나뭇가지나 풀잎을 얼키설키 엮은, 다소 엉성한 외관을 가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꿈의 집이라도 되는 듯 새집을 예찬하는 걸까? 새들은 중심점에서 거리가 같은 둥근 집을 짓는다. 이 둥근 모양은 끊임없이 새가 집의 안쪽 벽을 제 몸으로 누르면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새집은 새의 노력으로 그의 몸에 맞춰, 즉 집주인의 힘과 욕구에 맞춰 넓혀지는 집이다. 우리는 언제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자신을 보호해주는 "집-옷"을 원하는 것이다.
조개껍데기는 연체동물이 사는 가장 단단한 집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늬를 가졌다. 조개껍데기는 "제 내용물을 보호한다는 단순한 배려에서 해방되어 아름답고 단단한 기하학적 형태로 제 존재 가치를 정당화할"(폴 발레리) 집, 즉 "형성의 신비"를 가진 집이다. 암몬 조개의 화석을 보자. 이 조개껍데기의 신비는 그저 다채로운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형태를 취하려는 순간, 연체동물이 삶에 관한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 이 연약한 동물은 고뇌한다. 왼쪽으로 감길 것인가, 오른쪽으로 감길 것인가. 최초의 소용돌이를 형성하는 결정들, 그 뒤로 무늬를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결정들이 그의 껍데기를 신비롭게 한다. 늘 "자기 종(種)의 회전 방식을 어기는" 조개들의 의지 덕분에 무한하게 다양한 무늬의 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2년마다 이삿짐을 싸고 계속 변두리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저 아름다운 한담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러나 집이 부동산 가치로만 평가되는 현실 앞에서 바슐라르의 시적 몽상만큼이나 비판적인 것도 없다. 몽상은 가장 힘없는 이들이 미래를 향해 던지는 마지막 희망의 간절한 형식이다. 깊은 몽상은 네가 진정 꿈꾸는 것은 값비싼 집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상처받은 날들엔 구석처럼 안전하고, 힘나는 날들엔 잘 맞는 옷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집에 대한 원초적 꿈들아! 우리에게 어서 돌아오라.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