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2> 평촌신도시 개발 전의 안양시 벌말을 찾아
이번 회에는 평촌신도시 개발로 인해 사라진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평촌신도시라고 하면 1988년부터 경기 안양시 동부 지역에서 건설된 제1기 신도시 가운데 하나다. 평촌은 안양과 의왕의 경계 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비도시화 지역이었다. 그래서 안양시는 제1기 신도시 개발이 발표되기 전부터 이 지역에 대한 개발 계획을 세웠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200만호 건설이라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에, 그 숫자를 맞추기 위해 평촌 개발을 제1기 신도시라는 틀에 끼워맞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양시는 정부가 추진하는 평촌 신도시 개발에 불만이 많았다(안건혁 '분당에서 세종까지'). 그만큼 평촌 지역은 안양시 차원에서도 언젠가 개발을 해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의 평촌동은 벌말이라고도 불렸다. 수도권 전철 4호선 평촌역 하행 플랫폼의 준공 안내판에는 '벌말역'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개통 초기에는 중국어 식의 평촌(坪村)역이 아닌, 고유 한국어 식의 벌말역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이름 그대로 벌판에 마을이 군데군데 자리하던 평촌동과 주변 지역은, 이름이 주는 한적한 농촌 이미지와는 달리 특수시설이 밀집해 있던 안양과 의왕의 경계 지역이었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오뚜기 안양공장을 비롯한 공장들, 열병합발전소와 변전소, 자원회수시설, 안양농수산물시장, 안양교도소, 한센병력자 정착촌 성 나자로마을, 모락산 예비군 부대,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등의 특수시설이 모여있다. 최근 계획이 취소되었지만, 시외버스터미널도 이곳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이곳에는 수도권 제1 순환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는, 오늘의 주제인 내 친구의 집과 관련이 있다.
내가 평촌동에 산 것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87년 1년간이었다. 그 1년간,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의 평촌동 시골길 한쪽에 세워진 2층 연립주택에 살았다. 당시 산업도로라고 부르던 47번 국도에서 안양남국민학교 뒤편으로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 안쪽으로 한 가닥 나 있었다. 걸어서 15분쯤 걸리던 이 컴컴한 길 옆에는 무덤들이 있었고, 내가 살던 연립주택 너머로는 축사가 띄엄띄엄 있었다.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니, 포장되고 가로등이 설치되기는 했지만 그 길의 형태는 예전 그대로였다.
외식할 곳이라고는 47번 국도변에 있던 닭갈비집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이라면 대부분 좋아할 중국집이 동네에 없어서 1년간 짜장면을 먹지 못하다가, 과천 서울대공원에 놀러가서 1년 만에 짜장면을 먹고 감격한 기억이 있다. 여담이지만, 안양남국민학교는 1963년 10월 23일에 경기 여주시의 조포나루터에서 배가 침몰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 때문에 전국적으로 추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 곳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1986년 평촌동 지도를 보니, 내가 살던 연립주택은 47번 국도변에 위치한 당산미마을의 서북쪽 끝에 그려 있었다. 아마도 평촌의 전통마을인 당산미마을의 서북쪽 끝에 새로 들어선 주거지역이었을 것이다. 47번 국도에서 연립주택으로 오던 길에 본 무덤들도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당산미마을은 평촌개발 초기까지도 마을의 모습을 남겼다가, 지금은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녹지화되었다. 평촌신도시를 개발하기 전에 이 일대에서 발굴된 고인돌 13기 가운데 5기가 이곳 자유공원에 옮겨져서 야외 전시되고 있다. 내가 살던 연립주택은 현재의 자유공원 동북쪽 끄트머리 언덕 근처였을 것이다.
내 집을 지나면 벌판이 나타났고, 벌판 너머로는 신촌마을과 귀인마을이라는 오래된 자연마을이 있었다. 신촌마을과 귀인마을은 지금도 신촌동이라는 행정동 이름과 귀인공원·귀인중학교 등의 시설명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 위성사진 모드로 이 지역을 보면, 네모반듯한 주변 지역과는 달리 신촌마을과 귀인마을이 있던 지역에서는 지금도 구불구불한 블록이 확인된다.
신촌마을이 이런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서울의 대치동구마을이나 국기원 주변마을처럼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보니 신도시 개발 때 제외된 때문으로 보인다. 신촌마을에는 지금도 수령 200년쯤 되는 느티나무가 남아있다. 마을 제사를 지내던 당나무였을 이 나무는 꽤 높은 언덕 위에서 마을을 내려보고 있어서, 신도시 개발 전에 평촌 지역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게 한다. 신도시가 개발되었지만, 내가 살던 연립주택 주변이나 신촌마을의 지형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도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새삼 확인한다.
귀인마을은 신촌마을보다는 지대가 높지 않지만, 주민들이 신도시 개발에 반대했기 때문에 옛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경우다. 당시 주민들은 한국토지공사가 토지를 강제 수용하면 제대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고향에 재정착하는 길이 막힌다는 주장을 폈다. 강제수용 대신, 현지 주민들이 재정착할 가능성이 큰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자신들의 지역을 자체 개발하겠다는 것이었다.
1986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안양 평촌택지 공영개발 주민들 반대 - 귀인부락'에는, 이곳에 6대째 살고 있던 김정환씨의 "경주김씨와 온양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이 공영개발 방식으로 개발된다면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해 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을 제대로 보상도 못 받고 떠날 수밖에 없어 주민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발언이 실려 있다.
김정환씨는 귀인마을이 경주김씨·온양정씨 집성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귀인향우회가 1996년에 귀인공원에 세운 망향비에는 돌림자를 공유하는 김씨와 정씨가 많이 보이고 있다.
같은 기사에서 귀인마을의 정영승씨는 "이 지역을 토지수용방식으로 개발한다면 주민의 기득권을 도시 중산층에게 내주는 결과가 돼버린다"고 같은 기사에서 말하고 있다. 농민의 땅을 빼앗아 도시 중산층에게 주는 신도시 개발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일산을 비롯한 당시 제1기 신도시 예정지에서 일반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내 친구가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비닐하우스 겸 개 목장은, 당산미마을·신촌마을·귀인마을 중간의 벌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1986년 지도에서 이 벌판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네모난 기호들 가운데 하나였을 터이다. 1990년 3월 28일자 조선일보 '무허가 비닐하우스촌 화재로 천 3백평 전소'에는, 당시 귀인부락에 70동 규모의 무허가 비닐하우스촌이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내 친구의 집은 귀인마을 외곽의 이 대규모 비닐하우스촌에서도 더 바깥쪽의 벌판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자유공원 사거리 어디쯤,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아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내 친구의 집은 고속도로가 되었다.
이 글에서 나는 내 친구가 살던 비닐하우스를 '집'이라고 말했다. 요즘 정치권·언론 등 여론주도집단에서는 '집'이라고 하면 '아파트', 그중에서도 '고층 아파트 단지'라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밑으로 사라진 내 친구의 비닐하우스도 '집'이다.
내 친구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비주택 거주자, 즉 비닐하우스·판자촌같이 일반적인 형태의 집이 아닌 곳에서 거주하는 시민이었다. 언젠가 친구는 나에게, 딸기 치약을 먹었더니 과자 같아서 맛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또 어느 날은, 학교 다녀왔더니 집이 이사를 가버려서 새로 이사간 곳을 찾는데 한참 걸렸다는 말도 했다.
당시에는 나도 어렸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기억속에 봉인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도시 답사를 시작하면서,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 비닐하우스에 산 내 친구가 자꾸만 떠오른다.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와 사는 조손가정이었던 내 친구는 아마,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평촌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안양과 의왕이라는 두 행정구역의 경계에 집중된 특수시설, 신도시 개발로 인해 쫓겨나는 비주거 거주자. 내가 주목하는 갈등도시의 양상을 신도시 개발 전의 평촌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중심이 아닌 경계, 왕과 왕족이 아닌 평민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은 내가 12살이던 1987년, 아직 신도시가 아니던 평촌동 벌말이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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