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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부르던 나지막한 담장은 사라지고

입력
2022.01.12 22:00
수정
2022.01.26 15:24
27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주도의 집들은 현무암을 쌓아 만든 돌담을 집 둘레로 치고 긴 봉을 두 개 걸쳐서 문의 역할을 했다. 바람이 많은 섬인지라 기본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돌담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었고 도둑이 없는 섬인지라 방어의 목적이기보다는 최소한의 신호장치, 즉 주인이 집에 있는가 없는가를 알리는 장치로 문이 사용되었다.

전통적인 마을의 담장들은 굳이 돌담을 쌓지 않고 싸리가지로 담장을 둘러쳐서 집의 영역을 구분하였다. 그 담장은 마당을 집안일의 공간으로 활용하여 각종 음식물을 널거나 말리고 때론 방아질이나 필요한 집안일을 돌볼 때 그 영역을 관리해 줄 필요로 존재하기도 했다.

마을의 부자들은 진흙과 돌을 섞어 담장을 만들었는데 그 담장은 여러 문양을 넣고 중간중간 창을 내어 내외부가 소통될 수 있도록 구성하여 주었다. 담장은 마을 유지의 권위를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예쁜 장식을 하여 마을골목길과 잘 어울리도록 치장하였다. 일명 화담(花墻)이라고 부르는 담장들이 조성되곤 했는데 말 그대로 꽃담이다. 마을의 유지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담아 담장을 꾸몄다고 할 수 있겠다.

16세기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믿었던 임금이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가는 사건을 겪은 후로 씨족마을을 형성하며 살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하며 살아야 한다는 자구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의 질서는 우리다움으로 형성되었다. 씨족마을이다 보니 모두가 다 친인척이다. 그 안에는 음모도 경쟁도 없고 함께함에 의미가 강조된다. 다만 마을의 종손과 항렬에 따라 다소간의 위치가 조절될 뿐이다.

집은 외부로부터 보호를 위한 셸터(Shelter)로서의 기능이 우선이겠지만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부터는 관계라는 것이 형성이 된다. 골목을 마주하면서 이웃이 생기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관계가 생긴다. 그런 관계를 잘 형성하기 위해 과거엔 새로 이사를 오면 떡을 돌리고 인사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 추억의 담장이 주는 관계는 창문으로 소통되었다. 친구의 집 앞으로 가서 창문을 향해 목청껏 이름을 부르면 친구가 빼꼼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와서 놀자고 말하고 친구를 불러내면 대문이 열린다. 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라는 노래 놀이를 하며 옆집을 또 찾아가고 친구를 부르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마을 골목에 친구들이 모여 오징어 게임도 하고 숨바꼭질, 신발 뺏기도 하면서 왁자지껄 떠들면 어른들도 나와 한쪽에서 담소를 나누시고 형들이나 동네 누나들과 질서를 익혔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에게 담장은 닫힘이나 막힘의 공간이기보다 소통과 열림의 공간이었다.

현대사회를 살면서 담장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담장이 없다. 지금 있는 담장은 아파트 전체의 외곽을 둘러싼 벽과 같다. 담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차단의 기능을 가진 벽일 뿐이다. 벽에서는 친구가 찾아와 부를 수도 내가 얼굴을 내밀고 친구를 맞이할 수도 없다. 내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인터폰과 방화문 그리고 멀리 외부로 내다보이는 베란다의 창문밖에 없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 아파트는 조망이 참 좋아'라고 자랑하고 위로받고 있을 뿐이다. 친구는 휴대폰 속에 살고 이웃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김대석 건축출판사 상상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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