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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달렸어도 다치면 도축… 경주마는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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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전 9시 제주 제주시 애월읍 경마공원 '렛츠런파크 제주' 앞. 생명환경권행동단체 제주비건과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 활동가, 시민 16명이 '퇴역 경주마의 삶을 보장하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이들은 경주마가 소모품처럼 이용되고 버려지는 현실을 비판하고 정부와 제주도청, 한국마사회에 경주마의 복지체계 마련을 요구했다.
지난해 11월을 시작으로 세 번째 열린 이날 '퇴역 경주마를 위한 대한민국 행동 도축장 가는 길' 행사는 참가자들이 경마장에서 말 도축장인 제주축산농협 육가공 공장까지 약 8㎞를 걷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구간은 경마 경기에서 진 말들이 곧바로 도축장으로 이송되던 옛길이다.
오전 11시, 제주축산농협 육가공공장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실제 말이 도축되는 장소지만 도축장이라고 쓰여져 있지 않은 점에 의아해했다. 행사 참가자 김수정(44)씨는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한 말을 은퇴 이후 반려동물 사료로 쓰겠다는 지자체의 발상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백서윤(15)양은 "제주에 살면서도 말이 처한 상황을 잘 몰랐다"며 "경마를 뛰며 열심히 일한 말을 은퇴 후 존중해주지 않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2018년 5월 경주마 '승자예찬'(6세)은 다섯 번째 경주에서 부상을 입었다. 승자예찬의 아버지 말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 씨수말 중 하나인 '메다글리아 드 오로'. 하지만 다친 승자예찬에게 남은 길은 도축뿐이었다. 승자예찬은 450g당 2만 원에 고기로 팔렸다. 경마 도중 부상을 당한 경주마 '케이프 매직'(5세)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도축됐다. 경기가 끝난 지 72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말의 수명은 25~35년인데, 국내에서 경주마는 평균 3, 4세에 도축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은 국제 동물보호단체 페타(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PETA)가 2018년 4월부터 10개월 동안 축협 육가공공장에 위장 취업해 촬영한 영상을 이듬해 5월 공개하면서 드러났다. 페타에 따르면 경주마들은 사람들에게 폭행당하며 다른 말들이 죽는 장면도 지켜봐야 했다.
19년 차 마필관리사 고광용 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 노조지부장은 "경주마가 부상을 당해 치료를 요할 경우 완치해도 경쟁력이 떨어진다 판단되면 대부분 바로 퇴역시킨다"고 설명했다. 이어 "마주가 가입한 보험금을 받으려면 '경주마 불용' 판단을 받아야 한다"며 "이를 위해 말을 더욱 혹사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국내 경주마들이 사람으로 치면 10대에 보통 도축되는 이유 중 하나는 현 경마산업의 구조에 있다. 한혁 동물자유연대 전략사업국 국장은 "현재 국내 경마장에서는 입상한 말들에게만 대부분의 상금이 주어진다"며 "마주들은 경기에서 이기지 못한 말을 돌보거나 부상당한 말을 치료하는 대신 이들을 도축하고 다시 새 말을 사서 경기에 투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년이 지난 지금 퇴역 경주마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한 해 퇴역 경주마(경마에 사용되는 말 품종의 하나인 서러브레드 기준)는 약 1,400마리. 이 가운데 퇴역 이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비율은 해마다 늘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마사회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주마 가운데 퇴역 이후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 않는 '기타용도' 비율이 2016년 5%(70마리)에서 2017년 6.4%(89마리), 2018년 7.1%(99마리), 2019년 7.4%(103마리), 2020년 22.5%(308마리)로 늘었다.
2016~2020년까지 5년간 퇴역 경주마의 용도를 확인한 결과, 약 40%는 승용, 번식용으로 활용되고, 50%는 질병, 부상 등으로 도축됐으며 나머지 10%는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경주마가 퇴역하면 관상용 번식용 승용 교육용 등으로 신고해야 하지만 마주가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또 말 산업 육성 전담기관인 한국마사회도 퇴역 이후에는 마주의 재산권 행사로 관여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란영 제주동물권연구소장은 "승용, 번식용으로 활용된다고 하지만 실제 경주마를 승용으로 전환하는 수가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퇴역 경주마 중 상당수가 도축돼 말고기, 반려동물 사료 등으로 쓰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국마사회 측은 "기타용도는 경주마가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채로 퇴역하거나 경마장이 아닌 외부에서 장기간 체류해 경주마 등록이 취소되는 등의 경우"라며 "2020년 기타용도로 분류된 퇴역경주마도 시간이 지나 이후 용도가 결정되면 비율이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퇴역 경주마를 늘리지 않기 위한 방안으로는 먼저 경주마의 생산두수를 줄이고, 퇴역 주기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9년 제주도 내 경주마 실태 폭로에 참여했던 필립 샤인 페타 정책부서 수석 연구이사는 한국일보에 "한국에서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번식시키고 있다"며 "이는 무분별한 번식과 도축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혁 동자연 전략사업국 국장은 "홍콩의 경우 경주마가 1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한다"며 "경마제도를 없애는 게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퇴역주기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퇴역주기를 늘리는 전제조건은 경주마 복지를 위한 철저한 관리다. 권고 수준에 머물고 있는 말 복지 가이드라인을 의무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정현 전 한국재활승마협회 이사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망아지 때부터 혹사시키는 경우가 많다"며 "망아지 시절부터 제대로 된 훈련과 건강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퇴역 경주마를 위한 생크추어리(보호시설)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김란영 소장은 "마사회의 연 매출이 8조 원에 달한다"며 "말을 이용해서 많은 이익을 얻은 만큼 퇴역경주마의 처우를 나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재교육을 통한 입양, 생크추어리 확보 등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립 샤인 페타 이사는 "말을 노동이나 고기로 자금을 창출하는 가축으로 여기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상업적 목적 없이도 전 생애에 걸쳐 생명과 안전,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반려동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한국마사회 측은 경주마 활동 기간 연장과 보호시설 마련에 공감한다면서도 장기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국내 경주마 생산과 수급 환경을 고려하고 복지를 반영해 경주 편성을 추진해 나가겠다"며 "보호시설의 경우 경마산업 이해관계자들의 참여, 시설 설치 운영을 위한 재원 마련, 운영방법 등에 대한 장기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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