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1월 13일 '평화통일'이 국시 위배, 조봉암 간첩 혐의로 구속, 일사천리 사형 집행

입력
2022.01.13 05:30
1958년 1월 13일
이듬해 재심 신청 기각 후 다음 날 곧바로 사형 집행
52년 지난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1958년 1월 14일 자 한국일보 1면. 조봉암씨 등 7명을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 당헌 ‘평화통일’이 국시 위배.


나로선 아무 할 말이 없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다만 정치활동을 했다는 그것밖에 더 없을 것이다. 술이나 한 잔 달라.

조봉암, 1959년 7월 31일 교수대에서

1958년 1월 13일 죽산 조봉암 당시 진보당 당수가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 1958년 1월 14일 자 한국일보 지면 보러 가기 ☞ www.hankookilbo.com/paoin?SearchDate=19580114 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주소창에 URL을 넣으시면 됩니다.)

조봉암은 1심에서 간첩 혐의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유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은 항소심에서 간첩죄를 적용,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당시 법원은 허위 자백으로 간첩으로 몰렸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이를 무시했다.

이듬해 2월 27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변호인단이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7월 30일 이를 기각했고, 홍진기 당시 법무부 장관은 다음 날 사형 집행을 명했다. 구속 후 1년 6개월 만에 사형은 일사천리로 집행됐다.

당시 죽산에게 유죄가 내려진 혐의는 크게 세 가지였다. ①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구성해 중앙위원장에 취임하고(국가보안법 위반) ②육군첩보부대(HID) 공작요원을 통해 북한에서 금품을 받고 남한 정보를 제공했으며(형법상 간첩죄) ③당국 허가 없이 권총과 실탄을 소지했다(군정법령 위반)는 것이었다.

1959년 8월 1일 자 한국일보 3면, 조봉암이 사형되던 날. 2년을 끈 진보당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전후.


사형 집행 후 52년 지나 무죄 판결, 대법원 사과는 없어

고 조봉암 선생의 딸 조호정씨가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 판결에서 무죄를 받은 후 밝은 표정으로 법원을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사천리로 진행된 조봉암에 대한 구속과 재판, 사형 집행은 한국 정치·사회가 시달려온 '정치 살인' '사법 살인'의 대표적인 악몽이었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난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을 이승만 정권의 정치 탄압이라 결론 짓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 회복을 의한 적절한 조치를 국가에 권고했다. 이듬해 8월 조봉암의 유족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그해 10월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2010년 11월 1일 자 한국일보 사설, 조봉암 사건 재심 결정에 주목한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을 한다. 재판부는 당시 혐의 중 무기 소지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해 형을 선고 유예하고, 사형으로 이어진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는 모두 무죄로 선고했다.

대법원은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고 볼 수 없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며 "진보당의 통일정책도 북한의 위장된 평화통일론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조봉암의 간첩 혐의도 "유일한 직접 증거인 증인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다"며 무죄 판결의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은 과거의 판결에 대한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조봉암의 무기 불법 소지에 대해 선고 유예를 결정하면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을 뿐이다.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2년이 지난 후였다.

독립운동가 출신, 초대 농림부 장관과 대통령 출마… 이승만의 정치적 정적으로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한국일보 자료사진

1899년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조봉암은 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3·1 만세운동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 출소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박열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 흑도회를 조직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조봉암은 1922년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폐결핵으로 자퇴,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후엔 조선공산당 창당의 산파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7년의 옥고를 치룬다. 1945년에도 예비구금령으로 재차 구금돼 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조봉암은 해방 후 사상 전향을 해 1946년 6월 23일에는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는 전향성명을 내며 중도통합노선을 걸었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초대 농림부 장관과 제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6·25전쟁 중 이승만에게 낙망해 그의 퇴진과 내각제 개헌운동 등을 주도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부정 투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얻은 500만 표의 절반에 가까운 216만 표를 얻었다.

선거 후 그가 창당한 진보당 강령 1호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 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를 실현한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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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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