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4> 만월대 발굴현장 방문의 기억과 기대
한강변을 따라서 나 있는 자유로는 임진강 건너 도라산 출입관리소에서 끝나지만 길은 개성까지 뻗어간다. 물론 북쪽 구역으로 들어가면 자유로같이 넓은 길은 아니다. 70㎞ 정도의 거리인 서울과 개성은 과거에는 왕래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에서도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가며 임진강을 건넌 때가 황혼 무렵이었다고 하니, 일찍 나서 어른의 총총 걸음으로 간다면 하루에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1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하는 개성 만월대 발굴현장 공개회의에 초대를 받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광화문에서 버스로 출발해 만월대에 도착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성공단 지역 발굴현장에 이은 두 번째 방문이지만, 아직도 개성문화의 깊이를 음미하기에는 턱없다. 통관과 수속과정에서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히 가야 할 곳임에도 이렇듯 어렵게 여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년 전 방문 기억을 더듬는 것은 ‘다시 가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앞선 걱정 탓이다.
개성, 열린 성의 도시
개성(開城), 언제부터 ‘열린 성’이라고 불렸던 것일까? 기록에 개경, 송도, 황도 등의 명칭이 나타났지만, 아마도 조선시대 초기에 개성이라는 말이 보편화한 모양이다. 이 지역명 중에서 '개부'(開府)는 고려 초기부터 보이는 행정지역 명칭이어서 개성의 유래라고 할 수 있다.
태봉국의 궁예를 없애고 철원에서 고려를 건국했던 왕건은 919년 대대로 본인이 살아온 근거지인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다. 그해부터 개성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등극까지 우리나라 중세기 역사의 무대이다. 고려, 즉 코리아(Korea), 세계가 우리를 부르는 이름인 이 시대는 다원적인 세계관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했고 중국에서 아랍에 이르는 세계가 이곳을 드나들었다. 개성 앞 12㎞ 떨어진 예성강변의 벽란도가 바로 개성의 관문이었다. 고려에서 재상급 관리에 외국인이 상당수 있었고 전해오는 쌍화점(雙花店)과 같은 노래에도 외국인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개성이 국제도시였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개성이라는 말이 고려 사회의 열린 특성을 의미한다고 하면 견강부회인가?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리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송악산과 만월대
황성옛터, 이 노래는 거의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의 풍광도 이 노래 가사 속에 묘사된 것과 다르지 않고 그 우수 역시 우리의 맘 속에 그대로 있다. 그곳이 바로 만월대이다. 만월대(滿月臺)는 황궁이 있던 터를 부르는 이름이다. 고려사에는 본궐(本闕)이라고 칭하여 별다른 이름이 전하지 않은 것은 바로 광종 이래 황제의 대궐이기 때문이란다. 만월대를 중심으로 황성(皇城)이 여러 궁전들을 감싸고 있고 이를 방어하는 라성(羅城)이 1009년 강감찬의 건의로 북쪽의 송악산과 남쪽의 용수산을 축으로 연결하는 선으로 축성되고 다시 고려 말에는 황궁의 방어를 위해 황궁과 연결된 내성이 만들어지게 된다. 라성은 그 길이가 24㎞나 되니 엄청난 공력과 시간을 들여 만들고 유지한 것이며 아마도 당시 시가지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월대는 송악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송도(松都)라는 별칭의 유래인 송악산(松嶽山)은 원래 부소산(扶蘇山)으로 불렸지만, 속설에 의하면 신라 말 유명 풍수가인 팔원(八元)이 이 지역 거부였던 왕건의 4대조인 강충(康忠)을 찾아와서 '화강암 돌산인 부소산에 척박한 땅에 잘 사는 소나무를 심어서 풍성하게 보이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날 것'이라고 하여 심은 소나무를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란다. 개성 일대에는 우리 역사의 중세시대 오백년 도읍지로서 궁궐과 민가 그리고 사찰과 왕릉 등 엄청난 유적들이 송악산을 중심으로 산재하고 있다. 고려에 볼모로 잡혀 있던 경순왕(재위 927~935)의 릉이나 태조와 개국공신을 모신 숭의전지가 경기 연천군의 임진강변에도 있다. 송악산에서 동쪽으로 지척의 거리이다.
만월대에 오르다
버스에서 내려 작은 다리를 건너니 바로 돌계단이 앞을 턱 막는다. 계단이 단차(段差)가 크고 급하니 허리를 굽혀서 오를 수밖에 없다. 황궁에 오르는 자세이다. 송나라 사신이든 멀리 아랍 상인이든 이곳을 지났다면 절하는 자세로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페르시아 왕을 알현하러 가는 사신들이 페르세폴리스 궁의 입구에 황소의 문을 오를 때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일단 오르니 멀리 정말 임신한 여인의 모습처럼 송악산이 누워 있고 그 앞엔 평탄한 황궁터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계단에서 바로 정면에 장방형으로 주초가 보이는 곳이 현종대에 지어진 정궁인 회경전(會慶殿)이다. 계단에서 회경전으로 이어지는 길이 궁궐의 중심축이 되고 동과 서에 건물지들이 있는데 중심축보다는 상당히 낮아서 높은 축대로 구분된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의 발굴들은 초기 건축 궁궐터로 간주되는 건덕전(乾德殿)이 있었던 서편 구역에 이루어졌다. 추정 건덕전 이외에도 태조 어진을 모셨던 경령전(景靈殿)을 비롯한 많은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그간의 발굴에서 확인된 사실은 개축하면서 기반을 많이 높였다는 점이다. 궁궐 내부에서 단차가 큰 것은 이 지역의 지형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고려 황궁은 고구려 궁성건축의 전통을 이어받기는 하지만 이곳 지형에 맞춰 변형해 배치하느라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만월대의 조성과 관련하여 풍수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지만, 입구의 계단이 33단으로 구성된 것은 고려 황제가 살고 있었던 만월대가 불교에서 말하는 33천(天)의 중심천, 즉 제석천이 머무는 선견성(善見城)에 해당한다는 상징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상인 출신으로 왕이 된 셈인데 풍수설화나 건축의 불교적 상징으로 황권을 높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대고려전에서 희랑대사상이 기다렸던 왕건상의 통천관(천자가 쓰던 관) 역시 33단 계단의 상징과 통하는 것이다. 고려가 황제국으로서 세상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선언이다.
독보적이었던 고려 문화
고려시대 금속활자, 청자, 팔만대장경, 불화, 나전칠기 등의 문화는 창의성과 수월성에서 세계에서 독보적인 수준이다. 1123년 개경에서 한 달 남짓 살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최고의 찬사로 묘사한 ‘세밀가귀(細密可貴: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나 '최정절(最精絶: 비할 데 없이 정교하고 뛰어난)‘이라는 문구는 ‘궁전 속이 얼마나 화려하였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고려불화를 그린 솜씨로 그린 궁전 벽화가 걸려 있었을 터이고, 푸른 옥 같은 청자들이 상위를 호화롭게 하였을 것이고 고려나전의 화려함이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발굴에서 수습된 금속활자는 정보소통의 양과 질을 짐작하게 한다. 만월대에 서서 상상하는 찬란한 고려문화, 이것은 신라 골품제적인 신분제를 깨고 새로운 다원적 그리고 포용적인 사회로 가면서 남과 북, 안과 밖의 모든 지혜가 융합되는 사회를 추구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개성 공동발굴을 기대하며
성균관의 정원에서 진행된 보고회에서 남북의 학자들은 만월대 발굴이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잘 마무리된 것을 안도하면서 그간의 어려운 과정에 감회가 깊은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발굴은 시작일 따름이다. 만월대 황궁터는 후고구려에 의해 처음 조성된 것을 기반으로 하여 고려 초기 건축 이래 여러 차례 확장되기도 하고 또한 외침에 파괴되어 복원되기도 하였는데 마지막으로는 공민왕(재위 1351~1374)대의 홍건적의 난 때 크게 파괴되고 복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발굴에서 드러난 유구들은 마지막 단계 모습의 흔적일 따름이다. 그동안의 발굴에서도 주초 아래에 훨씬 오래된 유구들이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발굴 대상 궁궐지역만 40만 평에 달해 넓기도 하지만 더 오래된 유구들이 드러날 수 있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왕건릉에 들른 후 시가지로 나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앞으로 황궁 말고도 개성시가지 유적발굴은 어떻게 하나? 개발의 쓰나미가 밀려오면 북측 고고학자들만으로 할 수 있을까?’ 헛된 걱정만이 이어진다. 개성 같은 세계유산도시의 보존과 조사는 더욱 ‘고려적’ 개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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