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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은 꿈·신기루·그림의 떡"... 청년은 '사는 것' 아닌 '사는 곳'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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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부동산은 '첫눈'입니다. 해마다 생각나고 마주하고 싶지만 손으로 잡으면 잡히지 않기 때문이죠."
2022년 새해를 앞두고 한국일보가 청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부동산 인식 관련 설문조사 주관식 문항에서 나온 답변 중 하나다. 부동산 문제를 바라보는 청년의 허망한 시선이 첫눈이란 단어에 녹아 있다.
전문가들은 청년 세대가 부동산 자산에 있어 '학습된 무기력'에 빠졌다고 해석한다. 지난 5년 내내 대책을 쏟아냈지만 잡히지 않는 집값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투기 사태 등을 보며 '공정한 부동산 자산 축적'에 대한 기대감이 꺾였다는 것이다.
한국일보와 청년재단이 전국 19~34세 남녀 6,428명에게 부동산이 갖는 의미를 물어본 결과 가장 많이 나온 답변(유사어 포함) 10개 중 7개가 비관적 인식을 담은 단어였다. '꿈'(543건)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막연한 꿈', '헛된 꿈', '잡을 수 없는 꿈' 등 비관적인 유사어가 대부분이었다. △2위 신기루(228건) △3위 그림의 떡(188건) △5위 먼 미래(106건) △7위 뜬구름(75건) △9위 불가능(65건) △10위 어려움(59건)도 같은 성격의 답변이다.
청년들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을 이유로 들었다. 한 응답자는 "서울 집값이 10억 원이 넘어가는데 어느 세월에 지방 청년들이 적금을 들어 집을 사냐"며 "정부는 그 대책으로 신도시를 만들어 주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지방 청년도 서울에 살고 싶다"고 꼬집었다.
빈출 상위 10개 단어 중 상대적으로 부동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담은 답변은 △6위 안식처(91건) △8위 보금자리(69건)에 불과했다.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이며 보금자리이기 때문에" "집이 없으면 부평초 같기 때문에" "내 집이 있어야 불안해하지 않고 명확한 계획 아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등이 나왔다.
이외에 △무지개(비를 맞듯 내 집 마련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하지만 비온 뒤 무지개처럼 내 집 마련에 성공하는 상상을 하게 돼서) △터널(끝이 안 보일 것 같아도 결국엔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 믿어서) △절망이 된 희망(이대로는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내 집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날이 오면 좋겠어서)처럼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답변도 일부 있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이 같은 태도를 '학습된 무기력'으로 풀이했다. 내 집 마련이 가능할 것 같은 시기를 묻는 질문에 13.8%(858명)가 '평생 불가능'을 꼽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동산은 시장에 자유롭게 맡기기보다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답한 청년들 중 '차기 대통령이 집값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한 비중도 78.1%에 달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90년대·00년대생은 기성세대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자기 방을 갖고 자란 세대"라면서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는 있는데 정부의 26번에 걸친 부동산 대책으로도 집값이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서 부동산에 대해 자조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신하는 대표적 사례가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생기는 자산격차"라면서 "집값 폭등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부 개입이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결과를 통해 일종의 학습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LH 직원의 '땅투기 사태'와 관세평가분류원의 '세종 특별공급' 논란 등이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한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중백 교수는 "공정의 가치를 내걸고 출범한 정부인 만큼 정책 신뢰도 훼손에 더 큰 타격이 있었다"면서 "청년들 입장에서는 삶의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져 사회 전반에 활력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부정적 인식 속에도 부동산을 '투자 개념(buying)'이 아닌 '주거 개념(living)'으로 바라보는 응답 비중(54%)이 과반인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진욱 교수는 "지금처럼 주택 가격이 폭등했던 2002년 한 금융연구소가 이와 유사한 조사를 한 결과에서는 '집은 사는 것(buying)'이라고 응답한 비중이 90%에 육박했었다"며 "그때와 비교해 현 청년들이 바라는 부동산 정책 방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부동산은 시장에 자유롭게 맡겨야 한다'고 응답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다주택자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51.1%)거나 '세입자 주거권(임대차3법 등) 보호가 먼저다'(55.5%)를 택한 것에 대해서는 '정부 역할로 선택과 집중을 기대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신진욱 교수는 "현 청년들은 시장의 자본주의 원리를 중시하면서도, 과도한 부의 집중이나 일부 투기적 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부가 보완적 개입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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