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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1월 7일 '부실 시공, 예견된 참극'… 78명 사상자,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고

입력
2022.01.0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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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 7일
LP가스 폭발하며 부실 시공된 건물 무너져
대형참사 막을 기회 여러 번 있었으나 당국 묵살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28명의 사망자를 낸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사고 현장에서 구조반이 사망자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1993년 1월 7일 새벽 우암상가아파트에 불이 나면서 유출된 LP가스가 폭발, 4층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1993.1.7. 한국일보 자료사진

28명의 사망자를 낸 청주 우암상가아파트 사고 현장에서 구조반이 사망자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1993년 1월 7일 새벽 우암상가아파트에 불이 나면서 유출된 LP가스가 폭발, 4층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1993.1.7.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방관과 구조반원들이 무너져 내린 우암상가아파트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희생자를 실어 나르고 있다. 1993.1.7.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방관과 구조반원들이 무너져 내린 우암상가아파트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희생자를 실어 나르고 있다. 1993.1.7.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명을 담보로 도박을 한 셈인 부실시공업자의 부도덕과 당국의 무관심이 빚어낸 인재(人災)다.

붕괴 아파트 주민 윤숙영씨 한국일보 인터뷰

1993년 1월 7일 새벽 1시쯤 충북 청주시 우암상가아파트 지하상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진화 작업을 벌였지만 불길은 1층과 2층으로 번졌다. 주민들은 옥상으로 대피했다. 그리고 새벽 2시 화재가 진압되는 줄 알았지만 LP가스통에 불길이 옮겨붙으며 폭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붕괴했다. 지하와 지상 1층에 53개 상가점포가 들어있었고, 아파트로 사용되던 2~4층에는 59가구에 70세대 28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날 사고로 28명이 숨졌고,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3명이 사망했던 1970년 서울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후 최대 인명피해였다.

(※ 1993년 1월 8일 자 지면 보러 가기 ☞ www.hankookilbo.com/paoin?SearchDate=19930108 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주소창에 URL을 넣으시면 됩니다.)


부실시공, 관할구청 묵인… 곳곳에 대형 사고 예견

1993년 1월 8일 자 한국일보.

1993년 1월 8일 자 한국일보.

당시 아파트 부녀회장 윤영숙씨는 불이 나자 가족들을 대피시키며 화를 면했다. 하지만 같은 동에 살던 남동생 가족은 뒤늦게 옥상으로 대피했다가 건물이 무너지며 올케와 어린 두 조카가 화를 당하고 말았다. 윤씨는 한국일보 취재진에게 "시당국 등이 성의 있게 주민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며 "인명을 담보로 도박을 한 셈인 부실시공업자의 부도덕과 당국의 무관심이 빚어낸 인재(人災)"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윤씨는 81년 12월 입주할 때부터 이미 벽에 2~3㎝씩 균열이 가는 등 대형사고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암상가아파트는 지은 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수사 결과 건물 부실시공과 LP가스 관리소홀 등이 복합돼 빚어진 어이없는 참사였음이 밝혀진다. 사고 당시 아파트 상인과 주민 대부분이 화재보험에 기입돼 있지 않아 피해 보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①무면허 건축업자가 3차례 설계 변경

사고건물은 당시 청주에서 활발하게 건축사업을 벌인 주택업자 최계일씨(부도 후 잠적)에 의해 건립됐는데 최씨는 무면허 건축업자로 밝혀졌다. 최씨는 아파트 부지를 시청으로부터 불하받아 이 건물을 지었다. 아파트는 당초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건축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공사 도중 3차례의 설계변경을 통해 1개 층을 더 올리고 옥상에도 2가구를 추가로 짓는 등 건축상식에 어긋나는 시공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② 기준 미달 철제빔과 철근 사용

지하층 지반공사에서도 철제빔을 50㎝ 간격으로 설치해야 하는데도 2∼5m 간격으로 시공했고, 25㎜ 굵기 규격 철근의 절반도 안 되는 10㎜ 철근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③관리사항 보고 의무 위반, 관할시청 감시 해태

연건평이 9,090㎡인 이 건물은 5,000㎡ 이상이면 3년마다 관할시청에 관리사항을 정기 보고하도록 돼 있는 건축법을 지켜야 하는데도 준공 이후 관리자 측의 보고와 시청의 감시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④주민 하자보구 요구 묵살

이 같은 부실시공으로 이 건물은 입주 초부터 옥상이 균열돼 빗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는 하자가 발생해 1985년 주민들이 하자보수를 요구하며 집단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공회사와 청주시 측이 발뺌하자 1986년 가구당 100만∼200만 원씩 거두어 자체 보수를 했다. 1993년 초에도 2,000만 원을 각출, 벽면 보수를 하려던 참이었다.


한전 고압선 끊지 않아 구조 늦어져

1993년 1월 8일 자 한국일보

1993년 1월 8일 자 한국일보

불이 나자 청주소방서는 소방차 고가사다리차 등 60여 대를 동원, 진화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진입로에 차량들이 주차해 있어 접근이 늦어졌고, 건물 주변에 인접한 고압전선 등으로 옥상에 대피해 있던 주민 구조작업이 늦어졌다. 한전 충북지사는 사고 직후 고장수리반을 파견하고도 제때 고압선을 끊지 않았다. 한전 측은 '고압선 때문에 인명구조에 어려움이 있으나 고압선을 빨리 끊어 달라'는 소방서 측의 요청을 묵살했다가 건물이 완전 붕괴(2시 10분)된 뒤인 2시 18분쯤 상가 앞부분의 고압선을 절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청주소방서 측은 1992년 12월 30일 특별 소방점검을 통해 옥내 소화전과 자동화재 탐지기 등을 1993년 1월 27일까지 설치, 보수하도록 관리사무소 측에 시정명령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화재가 발생하기 불과 일주일여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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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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