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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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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챙겨보고 있다. 탄탄한 서사, 수려한 영상미, 배우들의 수준급 연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조명된 적 없었던 궁녀들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설정이 이 드라마를 더욱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궁녀들은 대체로 궁중 사극의 소품 정도로만 그려졌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사랑보다 자신의 주체적 삶을 선택하려는 궁녀인 '성덕임'이 주인공이다. 조연급의 궁녀들 역시 각자의 개성과 이야기가 있다. 심지어는 왕을 암살하려는 궁녀들의 비밀조직까지 등장한다. 이 조직의 궁녀들은 오로지 궁녀들만을 믿으며 궁녀들만을 보호하며, 심지어 무예에도 뛰어나다.
이 비밀조직은 역사적으로 거의 말이 안 되지만, 관객들은 사회적 변화를 통해 그 설정이 등장한 이유와 의미를 납득할 수 있다. 최근 드라마 '연모'와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가 인기를 끈 이유를 생각해보자. '연모'의 남장여자 왕 '이휘'는 학식과 무예에 뛰어나며 주체적이고 강한 인물로,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구한다. 또한 여성 댄서들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에서는 여성 댄서들이 외모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힘 좋고, 강단 있고, 자신감으로 '무대를 찢어버리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허구적 설정은 이처럼 여성이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재현되고 있는 맥락을 반영한다.
이러한 설정이 허구적일지언정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그 서사에 반영된 상상력이 현재 시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 대한 다양한 재현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설정이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여백으로 남아 있는 궁녀들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픽션은 그저 가짜가 아니다. 상상력에 기반을 두지만, 사건 자체의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배경, 인물 심리 및 세부 묘사의 충실함 등을 통해 '그럴듯한' 혹은 '있음직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 바로 픽션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소품, 설정 등의 고증에 공을 들이는 것도 바로 이 사실적인 신빙성, 즉 핍진성을 위해서이다. 설정은 단순한 소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핍진성을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진짜처럼 믿으며 보게 하고, 나아가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도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관객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픽션을 진짜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픽션의 기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허구적 설정들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있음직한' 이야기에 대해 '픽션은 허구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픽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부재를 보여준다.
픽션은 사람들에게,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창작물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넘어, 그것이 훼손하는 사회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창작자들이 표현의 자유만을 내세우며 '드라마는 드라마로, 영화는 영화로' 보라고 하는 것은 재현에 따르는 책임도, 윤리도 외면하는 것이다. 설령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한다고 할 때조차도, 중요한 것은 핍진성이 향하는 방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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