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묘비명

입력
2021.12.3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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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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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일랜드 극작가 겸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2021년의 마지막 날에 '묘비명'이라는 암울한 단어를 내세우는 게 내키지 않지만 '마지막'의 의미를 담아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적어보았다.

이 묘비명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우리 자세와 닮았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에 접어들어서야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불과 10개월여 만에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만들고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상향 조정했다. '사람이 먼저'라더니 정의로운 전환은 말뿐이고, 에너지 전환의 핵심인 업계와의 논의는 맨송맨송했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숙의민주주의를 하겠다더니 한 달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숙의'를 마쳤다. 그마저도 어떤 자료로 어떤 교육이 이뤄졌는지 공개하지 않았고, 강사진은 친정부 인사 일색이었다. 정부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짚거나 비판할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일인데 모든 게 충분하지 않았다. 더구나 2034년까지 석탄발전을 폐지하겠다고 했지만 어느 발전소를 언제 폐쇄하고, 인력은 어떻게 할 건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있다. 그저 목표만 내질러 놓은 탓에 발전소 노동자들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 여지껏 제대로 된 재교육도 없다.

더 큰 문제는 탄소중립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보니 때 아닌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는 점이다. 환경부는 내년 업무보고에도 그간의 성과를 자화자찬하는 데 온 힘을 쏟았을 뿐, 시나리오 이행 로드맵에 대한 언급은 단 3줄뿐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한 국가 전략 및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에너지·수송 등 부문별 법정계획도 감축목표와의 정합성을 고려하여 변경·수립한다"가 전부다. 어차피 다음 정권 일이라는 식이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늦었다. 이미 이상기후가 현실화돼 우리 삶을 덮치고 있다. 해외로 눈 돌릴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폭염과 폭설, 잦은 태풍 등으로 인한 피해가 매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이상기후로 입은 재산 피해는 1조2,585억 원에 달했다. 최근 10년 연평균 피해액의 3배 수준이다.

이미 입은 피해는 되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의 피해는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렸다. 계속 그 덩치를 키울 수도 있고, 반대로 최소화할 수도 있다. 향후 5년은 탄소중립을 향한 도전적 과제를 현실화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다. 5년간 우리는 2030 NDC를 달성할 로드맵을 구체화하고, 이를 실현할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우리에게는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며 국제사회에서 큰소리치고, 국내에선 최대 성과라 자부해놓고 대선 이후 연속성이 끊긴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후보자들은 지금이라도 후진적인 정치싸움을 내려놓고, 정해진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 제각기 나름의 구상을 구체적인 공약으로 밝혀야 한다.

자연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방향은 정해졌고, 목표는 야심 차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어려운 만큼 모두가 최선을 다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인류의 무덤에 이 묘비명이 새겨질 것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김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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