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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최전선' 간호사 7인의 소망 "우리가 계속 싸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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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에 걸친 코로나19와의 전쟁, 그간 코로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전 세계 사람들 숫자다. 3년간 치러진 한국전쟁 사망자 수가 200만 명 정도라는 걸 생각해보면, 지난 2년간 전 세계는 한국전쟁을 두 번 이상 치른 셈이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라는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전쟁보다 더한 참상의 크기를 어림짐작하는 데는 숫자만 한 게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전쟁은 전쟁이되, 살리기 위한 전쟁이다. 그 최전선에는 방호복으로 무장하고, 인공호흡기와 에크모(ECMO)를 갖춘 의료진이 있었다. 치료뿐만 아니라 식사 보조, 양치, 기저귀 교체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으며 백병전을 치러낸 간호사들이 있었다.
한국일보는 올 한 해 대한민국 감염의 전장에서 고군분투한 코로나19 병동 간호사들의 얘기를 들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인터뷰도, 사진촬영도 쉽지 않았다. 2021년의 눈물과 2022년의 희망, 간호사들의 메시지를 소개한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최월남(48) 간호사. 올해 27년차 간호사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힘에 부쳤다. 지난 11월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회복) 이후엔 특히 더 그랬다. 중환자실에 들어오는 환자들마다 기계에 호흡을 의존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불안감이 극에 달한 환자들의 끊임없는 요구사항과 불평불만을 다 듣고 견디는 건 일도 아니었다. 치매를 앓는 고령 환자는 중환자실 바닥에, 의료폐기물 상자에 시도 때도 없이 대변을 봤다. “아침에 중환자실 들어가서 점심 굶고 퇴근 시간 때까지 못 나올 때도 많다"는 최 간호사는 "겨울엔 방호복을 입으면 여름보다 더 땀이 많이 나서 쉽게 지치게 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70대 남성 행려병자가 중환자실에 왔다. 길거리 생활 3년째인 그가 입원하면서 병실은 역한 냄새에 휩싸였다. 다른 환자들 모두 불편을 호소했지만, 정작 그는 움직이기 힘들다며 씻기를 거부했다. 혈액순환도 잘 되지 않아 급기야 다리 피부가 썩기 시작했다. 결국 보다 못한 간호사들이 달라붙어 씻겼다.
"나중에 퇴원할 땐 그래도 '덕분에 살았다'며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최 간호사는 그래도 고맙다는 그 말, 그거 하나면 됐다고 했다.
청주의료원 코로나 병동 권다혜(27) 간호사는 올해 2년차다. 지난해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잡은 첫 직장이 청주의료원 코로나 병동이었다. 부모님 표정이 안 좋으셨다. 조심스레 입사를 포기하는 게 어떠냐는 말씀도 하셨다. 그때는 자신만만했다.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하겠다, 그게 권 간호사의 각오였다.
2년 지난 지금은 어떨까. “코로나 병동에 온 걸 후회한 적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했다. 가장 힘든 건 감정적 부분이다. 미국 국적의 10대 환자는 “돈 받고 일하는데 뭐가 힘드냐”고 했다. 약 복용법을 차근차근 설명했더니 어머니뻘 되는 환자는 “나이 어린 게 가르치려 든다”고 했다. 이슬람 음식인 할랄 푸드를 요구하는 외국인 환자의 거센 항의도 받아내야 했다.
몸이 아프니 말이 뾰족해지나보다 했지만 이런 일은 자꾸 쌓여갔다. "코로나 유행이 길어지면서 의료진 희생을 당연시하고, 특히 공공의료원에는 세금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아무거나 시키고 막 대해도 된다고 여기시는 분이 있어요." 그래도 버티는 건 선배 간호사들 덕분이다. "환자들 눈높이에 맞춰 모든 걸 다 해내려는 선배들의 고귀한 노력을 제가 꼭 이어나갈 겁니다."
가장 기뻤던 기억은 지난여름 병동에서 치렀던 돌잔치다. 확진 받은 아기가 병원에서 첫 생일을 맞는 게 안타까워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 비록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권 간호사가 부직포로 만든 케이크와 편지를 전달한 '코로나식 돌잔치'였지만. 눈물 흘린 건 아기가 아니라 간호사들이었다. "우리 간호사들에게 힐링의 시간이었어요."
국립중앙의료원 코로나 중환자실 이승연(27) 간호사는 올해 초 '회전근개파열' 진단을 받았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간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몸무게의 두 배가 넘는 환자들을 옮기고, 돌아 눕히길 반복해왔다. 어깨 근육이 성할 리 없었다.
한 달 뒤 병가에서 돌아왔더니 병원에선 예방접종센터 근무를 권했다. 좀 쉬라는 얘기다. 이 간호사는 다시 중환자실을 지원했다. 사람 없는 사정 뻔히 아는데,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점심도 거르고 하루 온종일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파김치가 되어 나오면 '내가 뭣하러 이 고생을 한다고 손 들었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환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은 곧 사라진다. “중환자실에 오시는 환자 분들은 대부분 제 부모님뻘 되세요. 그런 분들을 보면 엄마 아빠 생각이 나는 거죠. 힘들어 하실 때마다 여기서 잘 치료 받으시면 다시 건강하게 나가실 수 있다고, 어떻게든 그분들을 안심시켜 드리고 싶어요."
아쉬운 건 휴식과 보상이다. 이달만 해도 곧 그만둘 동료가 여럿이다. 주변에선 차라리 정규직 사표 내고 파견직을 하면 월급을 2, 3배 더 받을 수 있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간호사 일이란 게 엄청난 돈을 바라서 시작한 건 아니다. "휴식과 보상만 좀 더 나아진다면, 그래도 코로나 환자 곁에 남겠다는 간호사들이 많을 거예요. 저부터가 그렇거든요.“ 이 간호사의 소망이다.
올해 11년차인 서울아산병원 이민주(32) 간호사는 지난해 9월 코로나 병동에 합류했다. 원래 이 간호사는 말기 암 환자들을 10~12명씩 돌봤다. 코로나 병동에서 이 간호사가 맡은 환자는 5~6명. 환자는 절반인데, 일은 곱절 이상 늘었다.
암 병동에서야 환자의 식사, 대소변 같은 문제를 대부분 보호자들이 해결했다. 하지만 코로나 병동엔 보호자가 없다. 간호는 기본, 목욕부터 병상 정리에 택배 대신 받아다 주는 일까지, 이 모든 게 간호사의 일이다. 거기다 상급종합병원이다보니 상태가 나쁜 환자들이 온다. 분초 단위로 몸 상태를 체크해야 하는 비상 상황이 수시로 생긴다. 하루하루 마음이 무너져간다.
그럼에도 이 간호사는 따뜻한 말 한마디해 줄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암 병동에서 일했기에 어느 누구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잘 알아서다. 방법은 인원을 늘리는 것뿐이다. 이 간호사는 “병상 늘린 만큼이나 인력이 채워지지 않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내년에도 이대로라면 끝까지 자리 지킬 의료진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고 되물었다.
신촌세브란스병원 권보경(38) 간호사도 비슷한 심정이다. 17년 간호사 생활 중 지금처럼 사직하고픈 마음이 컸던 적이 없다. 간호사들 사이에선 '사직 꿈나무'란 말이 이미 유행이다.
계기는 지난 11월 위드 코로나다. 힘들어도 그 이전엔 중환자실에서 회복되어 나가는 이들이 꽤 많았다. 보람이 있었다. 위드 코로나 이후엔 얘기가 달라졌다. 그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데, 정부는 그저 병상만 늘리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의료진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선에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 때문인지 초창기 코로나 병동에는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넘쳤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했다.
심지어 간호사를 '서비스직'처럼 여기는 일부 환자들의 인식 때문에도 힘이 빠진다. "사람 목숨 갖고 하는 서비스는 없어요. 간호사는 환자 요구를 다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부산대병원 이정윤(45) 간호사는 어쩌다 쉬는 주말이라도 '전화 한 통 없나' 싶어 어색하다. 코로나19가 덮친 지난 2년간 '미안하지만 좀 나와달라'는 전화를 늘 받고 살아서다. "돌아보면 그간 365일 24시간 당직을 서왔던 셈"이라며 웃었다.
최근 확진자가 불고 위중증 환자가 늘면서 음압병동의 구분 자체가 사실상 사라졌다. 병원 전체가 음압병동이 되어버린 셈이니 일과시간에는 음압 구역을, 저녁 이후에는 비음압 구역을 세세하게 다 확인해야 한다. 일은 늘었고 여유는 없지만, 그저 간호사들끼리 '음압실에서 쓰러지면 내버려둘 수밖에 없으니 알아서 나와야 한다'고 서늘한 농담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래도 기쁨의 순간들은 있다. 한 번은 '생후 30일' 된 아기가 입원한 적이 있었다. 최연소 확진자였다. "아기와 엄마 둘 다 확진돼 같이 입원했는데,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간호사들이 대책회의를 열었어요. 아기와 엄마는 한 병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2주 뒤 다행히 무사히 퇴원했습니다. 아기 엄마는 지금도 고맙다며 이후 아이의 성장 이야기를 계속 전해주고 계세요."
이 간호사는 앞으로가 문제라 했다. 지금까지야 의무감 책임감으로 버텼다지만 코로나 상황이 어디까지 더 이어질진 알 수 없다. "지금껏 봤듯이 코로나19가 생각보다 강한 것 같아요. 미래를, 미리미리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경기 파주병원 이슬(32) 간호사는 스스로를 '일당백'이라 불렀다. 일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고령층 환자가 많은데 인력은 부족하니 병동간호사 이외에도 선별진료소, 생활치료센터 파견까지 모두 다 떠안아야 해서다.
하지만 힘들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긴 어렵다. 사망자 유족의 슬픔을 바로 발치에서 봐야 해서다. "감염된 환자가 돌아가시면 유가족들은 환자를 만져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거든요. 감염 위험 탓에 간호사들도 멀리서 봐야 하는데, 유족들에게 휴지 한장 건네지 못해요."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돌보고 있는 이 환자가 내 가족이나 친구라고 생각하면 지금 내 자리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 버텨요. 전담병원에서 일하시는 간호사들 덕분에 전국의 병원이 그나마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다른 간호사분들께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씀 드립니다."
이 간호사 또한 응원에 힘을 얻는다. "까다로운 상황 때문에 힘이 들긴 하지만, 병원 게시판을 보면 환자분들이 칭찬 글을 많이 올려주세요.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하고 있구나, 알아주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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