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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허가 판잣집 가득했던 논밭이 낭만·녹음 가득한 ‘힐링’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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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남쪽 끝자락엔 바쁜 일상을 잠시 잊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빌딩숲 대신 나무가 빽빽한 진짜 숲이 있고,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큰 저수지엔 오리가 갈대 사이를 헤엄치고 있다. 금방이라도 기차가 지나갈 것 같은 철길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 걷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까지 하게 된다. 분명 서울이지만, 전혀 서울 같지 않은 이곳은 구로구에 위치한 ‘항동철길’부터 ‘더불어숲길’까지 이어지는 ‘힐링로드’다.
힐링로드는 지도에 표시되는 정식 도로명이 아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 길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이름이다. 큰 도로에서 한 블록 들어왔을 뿐이지만, 시공간을 옮겨온 듯한 풍경이 지친 마음을 치유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구로구는 2년 전 항동철길 일대를 걸으며 잠시 ‘쉼’을 가져보는 ‘힐링투어’라는 여행코스를 개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부터 정식 투어는 중단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위해 찾고 있다.
항동철길은 ‘경의선 숲길’, ‘경춘선 숲길’과 함께 직접 걸어볼 수 있는 서울의 ‘3대철길’이다. 본래는 서울 오류동에서 경기 시흥시 군부대까지 연결되는 11.8㎞의 군용철도 ‘오류선’ 중 경기 부천시 옥길동까지의 4.5㎞ 구간을 칭한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걷는 철길은 오류동에서 항동까지 이어지는 2㎞ 정도다. 나머지 2.5㎞ 구간은 볼거리가 없어 걷는 이들이 거의 없다.
항동철길은 1959년 국내 최초 비료회사인 ‘경기화학공업회사’가 원료와 생산물을 운송하기 위해 설치했다. 과거 구로구에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 등이 있었을 땐 화물열차가 수시로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열차가 매일 새벽 한 번만 운행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산책로로 이용된다. 실제 항동철길에선 양 손에 짐을 든 지역주민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항동철길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 여러 번 놀란다. 초입에선 철길이 빌라, 아파트 등 주택가와 나무 한 그루 정도의 간격만 두고 있어,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아찔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주택가를 지나 언덕을 넘으면 1㎞ 이상 뻗어 있는 일직선의 철길을 마주할 수 있다. 양옆으로는 높이 솟은 ‘메타세쿼이아’ 나무와 각종 꽃나무가 빽빽이 자리 잡고 있다. 순식간에 서울 도심에서 옛 정취 가득한 시골로 옮겨온 느낌을 준다.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세심한 신경을 쓴 흔적들이 보인다. ‘항동철길역’이라는 간이역에선 철길 모양의 벤치에서 잠시 앉아 쉴 수 있고, 침목 중간중간에 쓰인 문구를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로 위에 올라 두 팔을 양옆으로 뻗고 중심을 잡는 앞 사람을 보며 웃다, 어느새 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콘크리트 한 점 보이지 않는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항동철길을 찾는다는 신민주(43)씨는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회사 생활과 육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며 “도심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서 멀리 여행 온 것 같은 기분도 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항동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엄청난 크기의 ‘푸른수목원’을 만난다. 2013년 개원한 푸른수목원은 서울시 최초의 시립 수목원이다. 서울광장(1만3,214㎡)의 15배인 20만956㎡ 규모다. 야생화원과 금개구리 서식장, 우리나무원 등 20개의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진 정원을 갖추고 있다. 항동철길이 자연 속에 안겨 있는 느낌을 주는 데는 푸른수목원의 역할도 크다.
푸른수목원은 항동 일대 변화의 시작점이다. 지금은 수목원까지 들어서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 항동 주변은 삭막했다. 한쪽엔 논ㆍ밭과 무허가 판자촌이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한쪽엔 작은 공장들이 밀집돼 있었다. 판자촌에는 주로 ‘영양탕’을 판매하는 음식점들이 많아, 일반인이 거의 찾지 않는 동네였다. 하지만 서울시와 구로구는 2003년부터 10년간의 노력 끝에 생태공원을 조성하는 등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푸른수목원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항동저수지가 눈길을 끈다. 한강에 익숙한 사람들도 규모에 일단 놀란다.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기 때문이다. 큰 규모만큼 볼거리도 많다. 저수지 중앙에는 갈대숲이 있고, 한쪽에는 연꽃 등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오리와 백로 등도 저수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 푸른수목원을 찾은 김연수(37)씨는 “한적하고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며 "TV와 컴퓨터에 빠져 지내는 아이들이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값진 공간"이라고 말했다.
푸른수목원은 단순히 ‘종’ 확보 중심의 수목원에서 탈피, 도심 내 생물서식공간의 생태적 기능을 가진 공간을 지향한다. 이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식물이 많다. 2,400여 종에 달하는 식물 40만 주가 수목원을 채우고 있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어울리는 도시농업체험을 위해 9,977㎡ 규모의 ‘지능형 농장(스마트팜)’도 문을 열었다.
푸른수목원 북동쪽 끝까지 가면 성공회대로 연결되는 산책로를 만난다. 구로구가 2017년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조성한 ‘더불어숲길’이다. 길이 480m, 폭 2m의 더불어숲길 곳곳엔 신 교수의 서화(書畫) 작품 31점이 안내판 형식으로 설치돼 있다. 이 때문에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작품 전시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산 중턱에 오르면 신 교수의 추모공원도 보인다. 추모공원엔 신 교수의 이름과 출생일, 사망일이 적힌 작은 너럭바위가 요란하지 않게 마련돼 있다. 그 옆엔 고인의 마지막 책 ‘담론’에 나오는 한 구절의 서화가 추모객을 맞이한다.
추모공원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구로올레길’ 산림형 3코스와도 이어진다. 구로올레길은 총 28.5㎞에 달하고, 산림형, 하천형, 도심형 등 총 9개 코스로 구성된다. 그 중 산림형 3코스는 항동철길, 천왕산 등을 품고 있어 이곳을 찾는 시민들에게는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매주 2~3회 더불어숲길과 구로올레길을 걷는다는 박인호(68)씨는 “야트막한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한겨울에도 어느새 땀에 푹 젖어 상쾌해진다”며 “산책로를 걸으며 좋은 구절을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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