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때 단체접종, 해열제 먹으며 근무… 의료진 "백신휴가 보장하라"

입력
2021.12.29 04:4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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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터샷도 반드시 맞아야" 병원들 종용
과중한 업무에 부작용 느껴도 휴가 못 써

지난 10월 12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의료진들이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서재훈 기자

지난 10월 12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의료진들이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서재훈 기자

서울 시내 A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민모(24)씨는 지난 17일 점심시간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부스터샷)을 했다. 병원 측이 지정한 날짜에 맞춰 동료들과 단체로 맞은 것이다. 민씨는 오후 근무 중 몸이 떨리고 기력이 빠지는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병원에선 휴식 대신 타이레놀을 줬다.

민씨는 "부스터샷을 접종하지 않으면 매일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확인서를 병원에 제출해야 해 맞을 수밖에 없었다"며 "하루라도 쉬고 싶었지만 병원이 예민하게 반응해 휴가를 달라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백신 접종이 거듭되자 일선 병원 의료진이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업무 성격상 백신을 누구보다 먼저, 반드시 맞아야 할 필요가 있고 소속 병원들도 이를 종용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업무가 과중한 탓에 부작용을 느껴도 제대로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형 병원조차 백신휴가 지급에 인색하고 설령 휴가가 보장돼도 눈치가 보여 쓰기 어렵다는 호소가 적지 않다.

28일 한국일보가 서울 시내 대형 병원 여러 곳을 취재한 결과, 일부 병원은 의료진에게 사실상 부스터샷 접종을 의무화하고 있다. 접종을 강권하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접종 날짜를 지정해 단체로 맞게 하거나 미접종 땐 사적 모임을 제한하는 등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식이다. B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권모(27)씨는 "(병원에서) 부스터샷이 의무가 아니라면서도 백신을 안 맞았다가 자가격리되면 그 기간의 50~100%를 연차에서 차감하는 불이익을 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백신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접종 부작용이 생기면 알아서 감수해야 한다는 원성도 많다. C병원 간호사 김모(25)씨는 "코로나 확진자는 늘어나는데 담당 간호사는 과로 탓에 그만두는 이들이 많다"며 "일반 병동 인력을 동원해 코로나 병동의 공백을 메우는 상황이라 세 차례 접종 모두 쉬지 못했다"고 말했다. B병원 간호사 권씨는 "백신 휴가가 공식적으로 주어지지만, 휴가를 쓰면 다른 근무자 부담이 가중되다 보니 아무도 신청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C병원은 상급종합병원인데도 백신 휴가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공지하지 않는다는 내부 지적도 나온다.

의료 현장에선 부스터샷 접종이 불가피하다면 휴식이라도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과잉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데 백신 부작용까지 견디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한 대형병원 간호사는 "업무 강도를 어쩔 수 없이 올려야 한다면 처우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병원들은 현실적 한계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B병원 관계자는 "의료진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고 싶지만 업무 증가에 퇴사자까지 늘어 인력난을 겪는 게 현실"이라며 "모두 백신 휴가를 가겠다고 하면 병원 운영이 어려워지는 만큼, 의료진도 일정 부분 양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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