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꺼내 보게 되는 영화들

입력
2021.12.28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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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날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성인인 내게 크리스마스는 대개 설렘보다는 부담감과 조바심이 이는 날이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픽업하는 케이크도 식당도 호텔도 조금이라도 알려진 곳들은 일찌감치 예약하지 않으면 금세 마감되어 버리는 데다 동선이나 여러 제반 사항들을 고려하며 눈치껏 예약을 해야 하는 일은 사실 꽤나 품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당일에 나섰다간 어디든 자리만 있다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 편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기에 11월 중순 정도부터 카페에서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들뜨고 기대감을 갖게 되기보다 이상한 피로감과 초조한 마음이 들곤 하는 것이다. 아마 크리스마스는 기념일 중에서도 모두들 행복하게 보내는 하루라는 인식이 강박처럼 뇌리에 박혀 있는 터라 어쩐지 행복하게 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발동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십대 중반부터는 이런 박탈감이나 행복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나만의 방식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다소 창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겐 꽤나 이상적이고 한 해의 결산이 되어주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시네마테크에서 봤던 영화들이 '멋진 인생',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러브레터' 같은 작품들이다.

우선 크리스마스에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비교적 예매가 수월하고, 상영작들의 완성도나 작품성 그리고 재미적인 측면까지, 더할 나위 없이 만족도가 큰 작품들이 상영되기에 실패할 확률도 적다. 지인들과 혹은 혼자 극장에 가서 앉아 있어도 외로울 틈 없이 오롯이 영화의 세계에 젖어 들 수 있고, 무엇보다 취향에 맞지 않은 식당에서 얼뜨기처럼 느껴지는 기분으로 식사를 할 때와 같은 불편함도 없다.

그렇게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기념의식처럼 행하다가 작년과 더불어 올해엔 시네마테크를 찾지 못했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심적인 여력이 별로 없었기에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에 있어도 마음은 자꾸만 산란해져 이럴 바에는 차라리 영화를 보고 돌아올걸 후회하지만,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올해는 와인 한 병과 함께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으로 스스로 합의를 이루었다. 때때로 새로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이 있는데, 내게는 올해의 크리스마스가 딱 그러한 상태였기에 결말도, 그리고 특정 장면들은 대사까지 떠오르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결말을 알고 나면 김이 빠져 다시는 찾지 않게 되는 영화도 있지만, 결말과 과정을 알고 있기에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영화들도 있다. 그리고 이미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보는 것이니 완벽하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새삼 이 영화가 이런 장면이 있었구나 하며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연말에 시네마테크를 찾아 언젠가 보았던 영화를 관람하며 한 해와 작별하고, 다가올 새로운 해엔 다시금 새롭고 낯선 영화들을 관람하며, 언젠가 다시 꺼내어 볼 영화 목록을 기쁜 마음으로 추가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만든 영화가 당신이 언젠가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영화의 목록 안에 추가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치지 않고 영화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


윤단비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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