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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와 단발령의 이데올로기

입력
2021.12.3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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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단발령

"상투는 ‘백호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투는 ‘백호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깎아내고 나머지 머리만을 빗어 올려 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내아이가 자라 결혼할 무렵이면 댕기를 풀고 머리카락을 모아 정수리 부분에서 감아 매 상투를 지었다. 상투는 이마에 두른 일종의 헤어밴드인 망건과 이어 클립처럼 생긴 동곳으로 고정시켰고, 대머리나 탈모로 여의치 않은 이들은 가발을 썼다. 외출 시 신분에 따라 머리에 갓이나 건, 관 등을 써서 상투를 가렸고, 특히 양반은 날 상투나 상투가 풀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중국 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바 삼국시대부터 이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상투, 망건, 동곳과 갓 등은 성별과 혼인 여부 외에도 권위, 권력의 상징이자 부를 과시하는 패션 아이템이기도 했다. 그래서 상투 높이를 규제하거나 동곳 등을 보석으로 치장하는 사치를 금한 때도 있었다. 조선 유교의 '수신(修身)'의 가치와 결합하면서 상투의 이데올로기적 상징성은 더욱 강화됐다.

1895년 12월 30일, 김홍집 개화파 내각이 고종 칙령 형식으로 내린 단발령은 2,000년 상투 문화와 풍습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히 혁명적 조치였다. 상투를 자른다(잘린다)는 것은 애당초 체면이란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으로 태어났거나 패륜적 중죄를 범해 체면을 박탈당한 이들의 형벌이었다. 면암 최익현의 '오두가단 차발불가단(吾頭可斷 此髮不可斷)이라는 선언, 즉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메시지는 당대 유학자들에게는 인격과 존엄의 함성이자, 효로 대표되는 인간 도리의 다짐이었다.

만38세 개화파 내무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단행된 단발령은 당일 고종과 황태자의 솔선으로 시작해 한양 도성서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됐지만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로 2년 만에 한 차례 철회됐다가 1900년 광무개혁으로 다시 재개됐다. 물론 상투령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고, 반발의 이면에 반일·반외세 의식도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촌마게(丁髷)'라 불리는 사무라이식 상투를 법으로 금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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