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과, 점수는요

입력
2021.12.28 04:30
26면
구독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허위경력 의혹 등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하고 있다. 2021.12.26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허위경력 의혹 등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하고 있다. 2021.12.26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아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결말이 좋지 않다. "하지마", "그만해" 라는 말에 금세 반응해버리는 아들은 삐치고 눈물을 글썽이기 일쑤다. 그래 봐야 다섯 살 애인데 너무 했나 싶어 “너가 이걸 잘못했으니 사과하면 아빠도 미안하다고 할게”라는 조건을 붙이거나,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아들에게 장난을 걸기 시작하면 와이프의 한숨이 뒤따른다.

“사과에 점수가 있다면 당신은 0점이야.” 굳이 점수까지 줘가며 후벼 팔 일인가 싶어 들어본 와이프의 진단은 이랬다. ①"아빠라고 본인이 다 옳다는 생각은 버려라" : 본인이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라. ②"사과의 때를 놓치면 아이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 사과는 바로 하라. ③"조건을 달지 말고 뭐가 미안한지 말하라" : 직접·구체적으로 사과하라. 한마디 더 붙이셨다. "어려우면 ③이라도 제대로 해. 그것도 용기야." 오은영 박사님급의 지적이었다.

대선 국면이라 쓰고 '사과의 계절'이라 읽는 때인가보다. 서민 대통령, 공정 대통령을 내세우는 유력 대선 후보들의 사과 행렬이다. 이재명 후보는 최근 장남 불법 도박 의혹이 제기되자 수 시간 만에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고 밝혔다. 광속 사과였으니 ②에 대해선 합격이다. 다만 아들의 성매매 의혹은 선을 그었다. “본인(아들)이 맹세코 아니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의혹을 가리키는 정황들이 다수 나오는 상황을 감안하면 구체성(③)이 아쉽다.

윤석열 후보의 사과는 ‘여의도 교과서’에 실릴 법하다. 반면교사의 사례로 말이다. 배우자 김건희씨의 허위 경력 논란이 본인의 언론 인터뷰로 일어난 지 만 하루 만에 윤 후보의 입에서 나온 말은 “현실을 잘 알고 보도하라”였다. 관례가 그랬다는 걸 모르느냐며 누군가의 기회를 박탈한 게 아니잖냐고 억울해했다. 잘못된 게 없어 억울해했고(①에 불충분), 적절한 시점도 놓쳐버렸다(②에 불충분). 몇 시간 뒤 김씨의 '즉흥 사과'가 보도되자 그제서야 태도를 바꿨지만 “국민의 기대에서 봤을 때 조금이라도 미흡한 게 있다면”이라는 조건부 유감(③에 불충분) 성명이었다. 이에 비하면 26일 배우자 김씨의 사과는, 내용면에선 구체적인 사과임(③)에는 분명했다. 정치적이니 전략적이니 하는 평가도 분명 나오지만, 적어도 내용면에선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치발(發) 사과’에서 진정성이 엿보였던 게 두번 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5ㆍ18묘역 ‘무릎 사과’, 두 전직 대통령 과오에 대한 사과가 첫 번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격 사면 소식에 모두가 당황 또는 환영 메시지를 낼 때 유일하게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민들께 많은 실망을 안겨드리고, 우리 당 전신인 새누리당이 입법부로서 충분한 견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점을 다시 한번 송구하게 생각한다”고 한 이준석 대표의 사과가 두 번째다. 시기적으로야 두 사과 모두 한참 늦었는데도 꽤 용기 있는 사과라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사과의 주인공은 그래서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그의 재판을 오래 취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과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옥중서신을 모아 최근 출간된다는 책에서도 국정농단 사건을 “주변 인물의 일탈”로 표현했다고 한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지만 이번엔 틀렸으면 좋겠다.

김현빈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