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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정신 뭉갠 '각본' 있었다니... '골때녀'의 자책골

입력
2021.12.26 16:00
수정
2021.12.26 17:3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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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골때녀' 경기 흐름 편집으로 조작
"3 대 1"? 없었는데 어떻게 경기 중계?
"제작진이 써 준 메모 촬영 때 읽어"
시즌1도 조작 의혹... "추가 입장 없다"

조작 방송으로 물의를 빚은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22일 장면. 화면 왼쪽 상단에 3대 2로 점수가 표기됐고, 진행자인 배성재는 "펠레 스코어가 만들어졌다"고 중계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3대 2란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SBS 방송 캡처

조작 방송으로 물의를 빚은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22일 장면. 화면 왼쪽 상단에 3대 2로 점수가 표기됐고, 진행자인 배성재는 "펠레 스코어가 만들어졌다"고 중계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3대 2란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SBS 방송 캡처

"자, 송소희 선수의 골로 3대 1로 따라붙은 FC원더우먼. 이 경기 결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경기 파주의 한 경기장. 방송인 배성재는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촬영장에서 제작진으로부터 이런 내용이 적힌 메모를 받고 큰소리로 말했다. 촬영 휴식 시간, 짬을 내 이뤄진 녹음이었다. 제작진이 그간 녹화 틈틈이 점수 중간 상황, 골을 응원하는 외침 녹음을 따로 요구해와 배성재는 이번에도 메모에 적힌 문구를 따라 읽었다고 한다. FC구척장신은 이 경기에서 FC원더우먼을 4대 0으로 초중반까지 압도적으로 몰아붙였다. 배성재가 "3대 1"이라고 말한 경기 스코어는 이날 일어나지 않았다. 26일 방송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렇게 진행된 녹화는 지난달 이뤄졌다.

조작 방송으로 물의를 빚은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22일 방송 장면. FC구척장신이 FC원더우먼 팀을 4 대 3(왼쪽)으로 앞서고 있다고 점수를 고지(왼쪽)했지만, 다른 상황판엔 4 대 0으로 표기돼 있다. SBS 방송 캡처

조작 방송으로 물의를 빚은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22일 방송 장면. FC구척장신이 FC원더우먼 팀을 4 대 3(왼쪽)으로 앞서고 있다고 점수를 고지(왼쪽)했지만, 다른 상황판엔 4 대 0으로 표기돼 있다. SBS 방송 캡처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FC원더우먼 팀과 이천수 감독. SBS 프로그램 홈페이지 캡처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FC원더우먼 팀과 이천수 감독. SBS 프로그램 홈페이지 캡처


공정에 민감한 시대 '골때녀'의 자책골

그로부터 한 달 후 당시의 이상한 녹화가 전파를 타면서 '골때녀'에 결국 일이 터졌다. 22일 방송에서 경기 조작의 흔적이 드러나 SBS 거짓 방송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예능에서 스포츠의 근간인 투명성을 훼손해 시청자를 기만했다는 지적이다.

제작진이 일부 조작을 인정하고 납작 엎드려 사과했지만, 해당 경기를 중계한 배성재와 이수근도 조작 가담 의혹이 제기되면서 뭇매를 맞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경기 방송 조작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잡음이 커지는 분위기다. 시청자는 공정에 더욱 민감해지는 데 정작 방송사 제작진들이 그런 대중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재미만 비윤리적으로 쫓다 문제를 자초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골때녀' 조작 방송이 드러난 과정은 이랬다. FC구척장신과 FC원더우먼이 3대 0에서 3대 2, 4대 2, 4대 3으로 긴박하게 경기를 이어가다 FC구척장신이 6대 3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방송 후 득점을 표시하는 상황판에 4대 0으로 표시된 장면이 뒤늦게 포착됐고, 온라인에 퍼지면서 조작의 꼬리가 잡혔다. FC구척장신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이끌었는데, 제작진이 예능의 재미를 위해 양 팀이 접전을 벌이는 것처럼 경기 순서를 제멋대로 뒤섞어 방송에 내보낸 것이다.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진행자인 이수근과 배성재. SBS 프로그램 홈페이지 캡처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진행자인 이수근과 배성재. SBS 프로그램 홈페이지 캡처


"눈물겨운 인간 승리가 거짓?" 비난 여론 거센 이유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 진행 순서를 바꿔 방송에 내보내는 일은 흔하다. 촬영 장면을 이리저리 섞어 재미를 살리는 제작 관행은 적정선에서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골때녀' 시청자는 분노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여성 출연자들은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눈물겨운 노력으로 운동장을 열심히 뛰었고, 그 인간 승리가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은 요인이었는데 정작 제작진이 조작 방송으로 프로그램의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제작진은 황선홍 최용수 김병지 최진철 이영표 등 축구 국가 대표 선수들을 각 팀의 감독으로 세워놓고는, 정작 뒤에선 승부의 과정이 중요한 스포츠 정신을 조작으로 깔아뭉갰다. 출연자 개인의 일탈에서 비롯된 일부 예능 프로그램 조작 논란보다 이번 '골때녀' 사태에 비난 여론이 더 거센 배경이다.

배성재는 "(제작진이 건넨 메모의 문구가) 예고에 쓰이는지 본방송에 쓰이는지 그리고 유튜브 영상에 활용되는지 어떤 경기에 쓰이는지 모르고 1년여 동안 기계적으로 읽었다"며 "그 멘트가 흐름 조작에 사용될 거라 상상한 적 없다. 뇌를 거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읽은 건 내 뼈아픈 실수"라고 사과했다. 배성재의 주장대로라면, 제작진이 녹화 당일 아예 편집 조작을 염두에 두고 진행자들에게 "원더우먼이 FC구척장신을 4대 3으로 맹추격합니다" 등의 거짓 멘트 녹음을 요구한 셈이다.

8월 25일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골때리는 그녀들'도 경기 흐름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화면 왼쪽 상단엔 점수가 2대 1로 돼 있는데, 오른쪽 하단 점수 상황판엔 3대 1로 돼 있다는 주장이다. SBS 방송 캡처

8월 25일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골때리는 그녀들'도 경기 흐름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화면 왼쪽 상단엔 점수가 2대 1로 돼 있는데, 오른쪽 하단 점수 상황판엔 3대 1로 돼 있다는 주장이다. SBS 방송 캡처


위 점수 상황판을 확대한 장면. 점수가 3대 1로 보인다. SBS 방송 캡처

위 점수 상황판을 확대한 장면. 점수가 3대 1로 보인다. SBS 방송 캡처


'아내의 맛' 폐지 1년도 안 됐는데... "일벌백계, 경각심 줘야"

SBS는 두 번의 사과문을 내 머리를 숙였지만, '골때녀' 제작진을 향한 거센 비난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8월 25일 방송된 FC국대패밀리와 FC월드클라쓰 경기에서 2대 2가 됐는데, 득점 상황판엔 3대 1로 표시된 장면이 포착됐다면서 추가 조작 의혹이 이날 제기됐다. SBS 관계자는 본보에 "추가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계속되는 잡음에 '골때녀' 일부 시청자들은 "믿고 볼 수 없다"며 시즌 종료를 요구하고 있다. 편집으로 경기 흐름을 조작한 '골때녀' 22일 방송의 다시보기 서비스는 모두 중단됐다.

'골때녀'를 비롯해 '아내의 맛' 등 올해 방송가에선 조작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예능가의 도덕 불감증과 공정성에 대한 둔감함이 근본적인 문제로 꼽힌다. 김교석 방송평론가는 "리얼 관찰 예능이 주류로 떠오른 지 오래인데 진정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스토리텔링을 위해 방송을 조작하는 건 인기에 취한 제작진의 오만"이라고 비판했다. 한석현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팀장은 "단순히 사과하고 잠시 방송쉰 뒤 다시 시즌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방송사가 조작에 참여한 제작진을 일벌백계하고 그 조치를 외부에 알려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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