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곳.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중남미의 제대로 된 꼴을 보여 준다.
문제는 돈. 정복도, 독립도, 독립 후 국가 건설도 늘 돈이 문제였다. 정복자들은 금을 찾아 그들의 신대륙 '엘도라도'로 향했다. 사막, 밀림, 바다, 원주민, 험난한 과정을 견뎌야 했다. 신대륙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늪이었다. 원주민 인디오들은 자신들의 구대륙을 지키지 못했다.
애초에 정복지의 국경개념은 미국과 달랐다. 통치를 목적으로 제국의 행정과 군사 편의에 맞춰 행정 단위를 설정했다. 이는 이후 지리·경제·정치 요소의 영향에 따라 독립된 단위로 발전했다. 불완전한 독립, 불안정한 국가 형성. 자체 투자나 개발은 힘에 부쳤다. 독립 국가라는 탈을 쓴 채, 자유무역이라는 허울 아래, 외국 자본과 기술에 의존해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해왔다. 유럽이 안채에 눌러앉아 있는데 미국이 사랑채를 차지하더니 이제는 중국이 유럽과 미국을 행랑채로 쫓아낼 판이다.
자본과 기술도 모자라 중국에서 만들고 미국에서 소비하다 버려진 옷까지 쏟아져 들어온다. 북반구에서 한 계절을 보내고 세일 철까지 넘기고도 주인을 찾지 못한 옷이 칠레 북쪽 아타카마사막에 무덤을 이루고 있다. 매년 안 팔린 옷과 헌 옷 약 5만9,000톤이 칠레 이키케를 통해 자유무역지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 중 약 3만 톤은 아타카마사막에 버려진다.
이키케는 칠레 신자유주의의 상징이다. 아타카마사막은 광물자원은 물론 태평양을 끼고 있는 해양자원의 보고다. 칠레는 19세기 말 이 지역을 둘러싸고 칠레와 볼리비아-페루 연합 사이에 발발한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남미의 실세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 구리 및 광물 주요 수출국이 될 기반을 마련했다. 피노체트 독재 시절(1973~1990)에는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이라는 칭찬도 들었다. 광물을 비롯한 자원 수출로 칠레는 지난 30년 동안 중남미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 중남미 최초의 OECD 가입국이라는 명예를 누렸다.
상위 1%가 국가 자산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OECD 최고의 빈부격차를 기록하는 동안 국가기간산업은 외국 기업 소유가 되고 소비주의가 만연했다. 빚을 빚으로 막는 삶이 극에 달하고, 2019년 10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독재정권 당시 제정된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을 쓰는 사이, 내년 3월에는 신자유주의를 파묻겠노라 선언한 극좌파 보리치 대통령이 취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칠레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2011~2013년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교육·의료보험·연금 개혁, 민주화, 환경보호, 소수자·여성·원주민 인디오 보호, 빈부격차해소, 노동시간감소를 기치로 세금, 이민을 앞세운 피노체트 지지자 극우 후보 카스트를 누르고 승리했다. 당선이 확정된 35세 하원의원이 동거녀와 함께 문신 새긴 팔을 치켜들 때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널을 뛰었다. 해외투자가들은 중남미에서 가장 살 만한 나라라는 매력이 시들해진 신자유주의의 모범생을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공산당과 거리를 둔다지만 '어른' 눈에는 불안하다.
이번 선거는 자율투표 역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기성 정치에 지친 젊은이들은 변화와 개혁을 원했다. 다음 정부를 위한 발판만 되어 줘도 좋다고들 한다. 피노체트 추종자보다야 낫지 않을까 한단다. 그러나 국민의 80%는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국가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칠레는 신자유주의의 모범생 대신 개혁 우등생이 될 수 있을까? 남미의 '피니스 테라에'(Finis Terrae, 땅끝)는 혈기왕성한 젊은 대통령의 뛰는 가슴만큼이나 요동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