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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생일 아침, 미역국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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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미역 한 줌과 황태 반 마리를 물에 불려놓는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 언제나처럼 미역국을 준비한다. "어떤 미역국 해줄까요? 소고기, 굴, 바지락?" 올해 아내의 선택은 황태다. 며칠 전 황태포 10마리를 주문한 사실을 아내도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소고기미역국은 아이들 생일 때 외에는 해본 적이 없다. 아내는 설렁탕, 곰탕처럼 멀건 국물에 소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싫어한다.
가족의 삼시 세끼를 전담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내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이다. 신혼 시절은 시간강사로 지방대학을 떠도는 신세라 변변한 선물 한 번 하기가 어려웠다. 아내도 매번 고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생일선물은 서로 안 하고 대신 내가 미역국을 끓여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즈음 지방대학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껌 한 통을 사서 생일선물이라고 불쑥 내민 것을 제외하면(하필 그날 따라 주머니가 바닥이었다) 지금껏 아내한테 생일선물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미역국을 빼먹은 적도 없다.
난 미역국을 만들 때 늘 국물을 낸다. 국물멸치 10여 마리와 고추씨 한 줌을 넣고 15분쯤 끓이다가 다시마를 넣고 5분 정도 더 끓인다. 맹물로도 끓이고 쌀뜨물도 써봤지만 아내가 좋아하는 깊고 구수한 맛은 역시 멸치국물에서 나온다. 마늘 한 스푼에 후춧가루 약간 더하고 액젓이나 참치액으로 살짝 간을 하면 그만인지라, 평소에 만드는 음식에 비해 조리법은 아주 간단하다. 예전에는 참기름에 볶아도 보았지만 아내가 그 맛을 싫어해 지금은 불린 황태채를 그냥 넣고 끓인다. 구수함은 덜해도 맛은 좀 더 깔끔하다.
언젠가 SNS에서 우스개로, "남편이 끓인 미역국이 30인 분이 넘어요"라며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그런 실수는 다들 한 번쯤 저질렀을 법하다. 바짝 마른 미역을 어느 정도 넣어야 양이 적당한지 초보자에게는 늘 어렵다. 나도 미역이 냄비 밖으로 넘쳐 당황한 적이 적어도 두어 번은 될 것이다. 한 번은 무엇에 홀렸는지 다시마 조각을 미역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아내가 왜 미역이 아니고 다시마냐고 묻고 나서야 내 실수를 깨달았는데 아내는 지금도 생일 때마다 그때의 실수를 상에 올리며 나를 놀린다. 이를테면, 지금의 미역국은 오랜 세월, 실수와 실험을 거친 후에 완성한, 나름대로의 상표라 하겠다.
누구에게나 삶의 변곡점이 있겠지만 내게는 아마도 처음 미역국을 끓이던 그날이 아닐까 싶다. 음식 솜씨가 좋아지고 미역국이 제 맛을 찾아갈수록 아내의 웃음과 말수는 늘고 시름은 잦아들었다. 아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로구나 깨달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올해 생일 저녁 주문은 '낙곱새'다. 재료 준비를 위해 느지막이 마트에 가는데 첫눈이 내린다. 눈이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이렇게 함박눈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날이 춥지 않아서일까? 솜털 같은 눈이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얼마 전, 소설가 한지혜의 수필집에서 눈이 "괜찮다. 괜찮다" 하며 내린다는 구절을 보고 참 괜찮은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중 정말 괜찮다고 여긴 구절 하나를 여기 옮겨본다.
창밖의 날씨든 내가 처한 인생이든 마음을 낮추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다 괜찮아질 수 있다. 나는 우선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한지혜 '참 괜찮은 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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