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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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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심사평은 시의 어디어디가 부족하다는 식의 충고를 담고 있지 않다. 자기 작품에 관한 엄혹한 평가를 원하는 분도 있겠고, 적절한 지적은 실제로 창작과 퇴고에 도움이 된다. 다만 투고자에게 필요한 건 비판보다 응원이라고 믿는다. 계속 시를 써도 좋다, 이런 말을 누가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시가 나를 부른 적도 없고, 그래서 나 없이도 시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싫고 무서웠다. 이번 심사평을 통해 당신들 없이는 우리 시가 별로 안녕하지 못하리라는 예견과 확신을 전하고 싶다.
'랠리'의 건조한 문체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때 마음을 쏟았던 대상이 ‘나’로부터 문득 동떨어져 존재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어쩔 수 없거나 어쩌지 못하는 거리감이 건조한 문장 사이사이로 유출된다. '날개 뒤에는 근육이 있습니다' 외 4편은 한마디로 거침없다. 하지만 거침없는 중에도 시의 언어는 산만하지 않다. 넘칠 듯 넘치지 않게 제어되는 정념이 놀라웠다. '베네수엘라'는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 깊은 결구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 작가는 자기 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듯하다. 작품이 조금만 더 쌓이면 그가 좋은 시를 쓴다는 사실에 누가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치카의 숲'은 앞으로도 손해를 볼지 모른다. 신인상 심사는 단정한 정념보다는 떠들썩한 감수성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등단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이처럼 넉넉한 분량에 담긴 유려한 문장이 외면당하는 일은 없다.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스로디카즈' 외 4편은 수많은 소년소녀가 등장하고, 위악적인 정황과 대화가 난무하며,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당연하게도 몇몇 기성 시인이 떠올랐으나 그럼에도 투고자의 연작은 여전히 새로웠다. 이 새롭고 좋은 작품을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나리라 본다.
'시드볼트' 외 4편은 비참한 죽음과 살아남음에 관한 이야기를 일관되게 풀어낸다. 아포칼립스를 예감하고 노르웨이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라’와 종말에 남겨진(혹은 종말을 목도 중인) ‘나’는, 어느 쪽이 살아남았는지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비참할 뿐이다. 삶과 죽음을 공평하게 끔찍한 것으로 만드는 저 압도적 절망감은 때로 ‘산불’로, 때로는 ‘깨진 도자기’나 ‘폭풍우’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간신히 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폭풍우')로서 분명히 어떤 현실의 환유일 비극적 사태를 생생히 기록한다.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투고작이 많았음에도 오산하 씨의 활달한 리듬은 단연 돋보였다.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더 믿음이 갔다. 심사위원단을 대신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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