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당선작 '떨어져 본 적도 없으면서!'

입력
2022.01.01 04:30
수정
2022.01.03 12:51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유림이 말고 더 나오고 싶은 사람 없니?”

있어요! 있어요! 있단 말이에요!

마음은 불같이 들끓는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옴짝달싹 못 하는 입술이 미워지려는 찰나 삐죽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어…… 저요.”

선생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방금 누구야? 수현이니?”

얼굴이 새빨개진 수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뇨! 저 아니에요!”

수현이를 보니 나도 저렇게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 같아 얼굴이 후끈거렸다. 어차피 떨어질 텐데. 홧김에 저질러버린 고백처럼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쉽게 튀어나온 용기가 무색하게 다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 애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책상 아래에서 엄지손가락이 문드러질 만큼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우아한 겉모습과는 달리 수면 아래에서 있는 힘껏 다리를 휘저어야 하는 백조가 된 것만 같았다. 책상 아래 부끄러운 손놀림을 들키지 않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세영이가 말했어요!”

수현이가 소리쳤다.

약간의 술렁임과 함께 반 아이들 모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뿐일지라도 한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모두가 나만 바라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응원 반 동정 반. 절대적인 강자에게 싸움을 거는 약자의 용기를 칭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상대가 유림이라면 누가 나와도 약자가 될 테니까. 온몸이 뜨거워졌다.

선생님은 내 이름을 칠판에 쓰시고는 스스로 선거에 나온 나와 유림이를 칭찬하며 박수를 치셨다. 와아아.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남자애들 몇 명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더 없으면 후보 추천 시간으로 넘어갈까 하는데, 더 없니?”

박수와 숨소리가 멈추고 짤막한 침묵이 이어졌다. 당선될 가능성이 없는데 괜히 지원해서 망신만 당할 것 같았다. 추천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아 유림이와 단둘이 출마하게 되지 않는 한 부회장에라도 당선될 일은 없었다. 이왕 저질러진 일 후보 추천이 안 나온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후보자 추천 시간이 시작되자 수현이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저는 혜주를 추천합니다. 혜주는 급식당번을 할 때도 배식을 공평하게 하고 청소 시간에도 항상 대걸레를 깨끗하게 빨아요.”

선생님이 칠판에 혜주의 이름을 적었다. 강유림, 한세영, 안혜주. 아직 까지는 세 명뿐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남자애들도 자기들끼리 몇 명을 추천할 것만 같았다.

“선생님, 저는 현수를 추천합니다. 현수는 축구도 잘하고 우유도 잘 먹어요.”

아니나 다를까 민철이가 현수를 추천했다. 남자애들이 키득거렸다. 축구를 잘하는 거랑 회장이 되는 건 무슨 상관인지, 그냥 아무나 추천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어젯밤부터 끝도 없이 고민하다가 자진해서 나온 선거인데. 장난스럽게 서로를 추천하는 애들이 원망스러웠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나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수네 일당이 어느 날보다도 얄미웠다. 그러면서도 문득 어차피 떨어질 거라면 후보자가 많이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낙선자가 된다면 그 틈에 숨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금방 잊힐 텐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을 언니가 미웠다.

무리해서까지 회장 선거에 나가게 된 건 전부 다 언니 때문이다. 이 시기만 되면 제발 선거에 나가보라며 닦달하는 엄마를 그렇게 만든 게 모두 언니니까.

언니는 중학교에 올라간 첫 학기에도 회장을 했다. 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 부회장에 전교 회장까지 안 해본 직책이 없었다. 내 친구들과 비교하면 유림이랑 제일 비슷한 부류였다. 유림이도 3, 4학년 모두 회장을 했고 아마 이번 학기에도 회장이 될 테니까. 유림이는 씩씩하고 예쁘고 공부도 잘한다. 심지어 피구도 잘하고 착하기까지 하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선거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유림이를 뽑았을 거였다. 유림이는 가장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 중 한 명이다. 그런 유림이도 집에서는 언니 같은 사람일까. 아마 유림이는 집에서도 착한 언니일 것이다.

엄마가 종종 반장 이야기를 꺼내면 언니는 신이 나서 거든다. 학기 초만 되면 매일같이 반장 선거에 나가보라고 한다. 떨어져도 별일 아니라고, 꼭 나가보기만 하라고 매번 귀찮은 말만 해댄다. 하필이면 그날은 아빠까지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한 번만 언니 말을 들어보라고, 반장에 당선되는 것도 별일 아니지만 떨어지는 건 더더욱 별일 아니라며 부추겼다. 입맛도 없는데 밥상에서 그 얘기를 하니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회장 선거에 나가기 전까지는 평생 학기 초마다 이 일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덜컥 서러워졌다.

“엄마랑 아빠는 내가 회장 선거 나가서 떨어져도 좋아? 내가 망신당하고 오면 엄마랑 아빠는 기분이 좋냐고!”

지겨운 잔소리가 그날따라 더 짜증이 났다. 하필이면 중학교 반장 선거가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이틀 빠른 바람에 중학교 첫 학기에도 여지없이 반장에 당선되어 의기양양해진 언니가 괘씸했다.

“떨어져 본 적도 없으면서! 언니는 떨어져 본 적이 없으니까 쉬워 보이는 거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나를 뺀 모두가 한 편이라는 생각에 순간 울컥했다.

“너도 떨어져 본 적 없잖아. 선거에 나가봐야 떨어지기라도 하지. 한 번만 나가 보라니까? 너도 회장 시켜준다고 하면 할 거잖아.”

언니가 당당히 말했다. 언니 말대로 선거를 하지도 않고 내게 회장을 시켜주면 고민을 하다 할 것 같긴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언니는 말을 참 쉽게 한다. 나는 사실 떨어져 본 적이 있는데.

3학년 때 처음으로 한 반장 선거에서 후보자 추천을 받아 선거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유림이는 자진해서 나갔는데 유림이가 당선되고 나는 한 표밖에 받지 못했었다. 그 한 표는 내가 찍은 표였는데. 그럼 날 추천해준 애는 찍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나를 추천해서 창피하게 만든 걸까.

처음으로 하는 선거였고 당시에는 아무나 막 추천하는 분위기였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한 표만을 받고 떨어진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매번 당선되는 언니 때문에 집에서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 년 전의 회장 선거를 기억하는 애들은 거의 없었으니 사실상 없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 얘기만큼은 하기 싫어서 언니의 말에 입을 꾹 닫은 건데 언니는 마치 자신이 말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기세가 등등해졌다.

“봐봐 맞지? 나간 적이 없으니까 떨어져 본 적도 없잖아. 나도 매번 나갈 때마다 얼마나 두려운데. 애들 앞에서 연설하는 게 얼마나 떨리는지 네가 알아? 떨어지면 창피할까 봐 걱정도 되고, 그래도 나가는 거야. 한 번뿐인 기회잖아.”

회장이 뭐 별거인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고작 반장인데 그게 뭐라고, 언니는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언니의 생각이 다 옳은 말인 듯 가만히 들어주는 엄마와 아빠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내 편이 한 명도 없는 것만 같아 속상했다.

엄마랑 아빠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동네 아줌마들은 엄마를 만나면 매번 언니 얘기만 하는데 언니 자랑으로는 부족해서 이제 나까지 회장을 해야 하는 걸까. 언니가 선거에서 당선되는 건 지겨워진 걸까. 끝까지 나간다고 하지 말걸.

어느덧 후보자 추천 시간이 끝나고 연설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뭐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다. 내 차례가 되면 교탁으로 걸어 나가 말을 해야 하는데 어젯밤에 준비한 연설 내용이 흐릿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쪽지로 적어올걸. 종이에 쓰면 애들한테 들킬까 봐 안 적은 건데 갑자기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제가 회장에 당선된다면…… 화목한 반을 만들고…….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렸다. 시간은 날 기다려 주지 않았다. 칠판에 이름이 적힌 순서대로 유림이가 첫 번째로 교탁에 섰다. 유림이가 끝나면 내 차롄데, 빨리 기억해내야 했다.

“제가 학급 회장에 당선된다면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여 학급 일을 도맡아 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친구들을 섬기겠습니다.”

막힘없이 이어진 유림이의 말이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하필이면 분단 끝자리여서 교탁까지 나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책상 하나를 지날 때마다 애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양손에 주먹을 꽉 쥔 채 일단 앞으로 나갔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너무나도 많았다. 선생님은 늘 이런 기분이셨을까. 모두가 내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만들어 놓은 몇 개의 문장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시작했다.

“제가… 학급 임원에 당선된다면… 우리 반 일에 가장 앞장서고… 화목한 반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 마디를 뱉고 껌뻑 고개를 숙였다. 한 마디짜리 연설이라니, 너무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애들 앞에 서니 한 문장도 어려운 일이었다. 기억도 안 나는 연설문을 떠올리면서 말을 더듬는 것보다는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말하고 나오는 게 나았다. 보나 마나 유림이의 당선이 유력했다. 정확히는 유림이의 당선보다 내 낙선이 확실시되었다.

형식적인 박수는 나에게도 쏟아졌지만 너무 창피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제 더 준비를 많이 할걸,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뒤이어 추천으로 입후보한 애들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투표 시간이 다가왔다. 친한 친구를 뽑는 게 아니라 우리 반의 반장으로 일하기에 가장 적합한 친구를 뽑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지루한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서둘러 내 이름을 적고 부랴부랴 종이를 접었다. 후보자가 자신의 이름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인데 혹시라도 누가 볼까 이름도 급하게 날려 적었다. 혹시 글자를 못 알아보는 일은 없겠지 하는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나를 찍어주는 애들이 몇 명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기대감도 있었다.

개표가 시작되자 모두가 숨죽이고 칠판만을 바라보았다. 한 열 장 정도를 열었을까. 유림이의 이름 옆에는 이미 바를 정자가 빠른 속도로 완성되었고 이제 정자 두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변은 없었다. 중간 넘게 개표가 진행되어도 아직 내 이름은 없었다.

한세영.

번뜩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쓴 표일 텐데. 벌떡 고개를 들어버린 모습을 애들이 봤을까 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내 이름이 한 번 더 불렸다. 분명히 내 이름이었다. 내 이름 옆에 막대기가 하나 더 그어졌다. 나를 찍어준 사람이 교실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번에는 한 표로 떨어지는 일은 면했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찍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나를 찍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결국 유림이가 회장에 당선되었다. 혜주는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나는 떨어졌다. 혜주가 미운 건 아니었지만 자원한 사람은 떨어지고 나갈 생각이 없던 사람이 부회장을 한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선거가 끝났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선생님은 유림이와 혜주에게 한 마디씩 시키고는 앞으로 우리 반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떨어진 친구들도 함께 회장, 부회장을 도와주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거라고, 학급을 위해 선거에 나온 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거라며 애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 표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나를 찍어준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전처럼 창피하지만은 않았다.

집에 가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책가방을 싸는데 수현이가 내 자리로 왔다.

“세영아 너 오늘 멋있었어. 사실 나도 너처럼 선거에 나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손이 안 올라가더라. 네가 마지막에 나가는 거 보고 나도 나갈까 했는데 떨려서 못했거든. 용기 내서 나가는 널 보니까 괜히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너 뽑았어. 내가 도움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꼭 말해주고 싶었어.”

한 표는 수현이의 표였다. 고작 한 표이긴 했지만. 뿌듯했다. 말을 마친 수현이는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지난번과는 달리 떨어졌지만 그렇게 속상하지는 않은 날이었다. 선거에 나가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표도 받았으니까. 이제 나는 떨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지자도 생겼다. 언니는 매번 누가 자신을 뽑아줬는지도 몰랐을 테지만 나는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안다. 나에게는 수현이라는 든든한 친구가 생겼다.

오늘은 편하게 잠이 들 것 같다. 나는 여유롭게,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주인공이 될 생각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내 이름을 써준다는 건 많은 표를 받는 것만큼이나 괜찮은 일이니까. 엄마와 아빠와 언니에게 수현이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내일은 수현이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말할 생각이다. 괜스레 마음이 붕 뜨는 기분이다.

김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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