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학생에게서 스페인으로 떠난다는 연락을 받았다. 걱정부터 앞섰다. 취업 대신 세계일주 여행을 선택한 데다 혼란한 코로나 시국에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할지 여간 불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의 첫 시발점으로 왜 스페인을 선택한 걸까. 잔소리를 삼키며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고야'의 그림을 직접 만나 여행을 지속해줄 기운을 북돋우고 싶다 했다. 청춘의 혈기가 부러웠고 낡은 노파심이 부끄러웠다. 안전한 여행을 기원할 음악선물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이 글은 스페인에 막 도착했을 용감한 학생에게 전하고 싶다.
스페인 작곡가 엔리크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에게 동향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영웅과 같았다. 1896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의 그림들을 만나 강렬한 인상을 받은 그라나도스는 위대한 스페인 예술가에게 바치는 음악적 헌사로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작곡한다. 그라나도스는 고야의 그림에 담긴 18c 스페인의 일상과 풍광, 인물과 장면, 향토적 색감을 '어두운 세상을 밝혀줄 지중해의 빛'이라고 찬양했었다. 이러한 스페인 정신의 본질을 음악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그라나도스는 판당고와 호타 등의 스페인 특유의 민속리듬과 기타와 캐스터네츠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스페인 특유의 사운드를 적극 활용하며 1911년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완성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Los majos enamorados)'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곡은 달콤한 유혹에서부터 죽음이 갈라놓는 이별에 이르기까지 연인들의 일대기를 음악의 줄거리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논리적 구조를 갖춰 전개되지 않는다. 형식적 통일 없이 장황하게 나열될 뿐이다. 청중 역시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논리보다는 감각에 의지해야 미묘한 관능에 다다를 수 있다.
고야의 그림(Capricho, Tal paracual)은 곡의 첫머리부터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 가면을 쓴 여인의 허리를 감싸안은 남성이 사랑의 말을 건네는 장면인데, 그라나도스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커플의 기쁨과 설렘을 표현하기 위해 고야의 고향인 아라곤 지방의 춤곡 호타리듬과 스페인 민요 트리필리를 적극 활용했다. 3박의 경쾌한 리듬을 타고 호화찬란한 음향이 펼쳐지는데, 사랑에 막 빠져든 연인들처럼 악상 역시 절제나 겸손의 미덕과는 거리가 멀게 들린다.
마지막 대목 '사랑과 죽음의 발라드'도 같은 제목을 가진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시작부분에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이 그림에선 같은 주인공들의 비극적 장면을 담고 있다. 남자는 칼에 찔려 고통 속에 죽어가고, 그를 부둥켜안고 있는 여자의 표정 역시 슬픔의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고야의 그림처럼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 그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인 고통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악상이 펼쳐진다. 전체적인 어조는 악보에 몇 번씩이나 등장하는 con dolore(고통스럽게)란 지시처럼 비극적이다. 마지막 장의 악보엔 'muerte del majo(남자의 죽음)'란 문장이 직접 기입되어 있다.
고예스카스는 오페라로 진화해 1916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오른다. 서사를 갖춘 이야기와 민요를 뿌리에 둔 선율이 피아노곡을 오페라로 재창작하는 데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곡가는 이 곡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뉴욕 공연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던 도중 그라나도스가 타고 있던 서섹스 호가 독일 잠수함 어뢰에 의해 침몰당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비극의 아우라로 더 찬란히 피어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고야의 그림이 담고 있던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을 작곡가의 운명과 연결시키며 고예스카스의 선율을 오래도록 찬양하고 음미했다. 그러므로 세계일주를 시작하며 스페인에 막 도착했다는 학생에게 문자를 남겼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의 그림을 마주할 적엔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를 꼭 함께 들어달라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