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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사라지고 권력투쟁만 남은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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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한 인간이 통치자가 될 수 있을까? 이번 대선이 던지는 질문 같다.정치가의 도덕성에 비례해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나, 이번 대선은 정도가 심하다. 평균 수준에도 못 미치는 후보들의 도덕성 논란을 보며, 이런 상황이 관용된다면 대체 정치란 무슨 의미를 갖게 될지 생각해보게 된다.
잘못을 안 할 수는 없는 게 인간의 삶이고, 과오를 이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이라는 옛 성현들의 말에 틀린 것은 없다. 잘못 없고 과오 없는 삶을 지향할 수는 없다. 그때마다 용서를 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분투노력하는 현실적인 인간에게 사람들이 더 큰 믿음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이 잘못을 부인하거나 사과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게 끝이라는 데 있다. 돌아서면 다시 저열한 비난전이다. 사과조차 선거 전략이다. 그 뻔뻔함에 절망감이 든다.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으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선거로 승자는 결정될 것이나, 존경할 만한 대통령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정치가 도덕성 심사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할지 모르겠다. 정치가 가진 권력 투쟁적 본질을 무시할 수 없고, 그렇기에 정치와 도덕은 구분해야 한다고 응수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단, 권력 투쟁이 정치의 한 요소나 수단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정치의 목적은 될 수 없다는 전제는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정치가 좋은 신념이나 도덕의 문제와 무관한 것이라면, 정치라는 인간 행위에 어떻게 소명의식이나 책임감이 깃들 수 있겠는가. 권력이라고 하는 악마의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을 회피할 수 없는 게 정치라지만, 그렇다고 악마의 마음으로 악마의 수단을 손에 쥐면 정치가는 악마가 되고 만다.
정치가가 감당해야 할 윤리로 막스 베버가 '책임 윤리'를 꼽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는 권력, 즉 합법적 폭력이라는 위험한 무기를 다루는 인간 활동이다. 의도의 선함보다 결과의 선함에 정치가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좋은 신념을 앞세우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거의 없다. 책임감 있는 정치가와 그렇지 않은 정치가가 나눠지는 것은 이 지점이다. 책임 윤리를 무시하는 정치가는 권력 정치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권력 투쟁에서 승자가 되고자 할 뿐, 윤리적 책임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책임 윤리를 가진 정치가는 "그럼에도!(dennoch!)"를 외치는 사람이다. 상황 논리에 굴하지 않고 좋은 신념과 좋은 결과를 양립시키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사람이다. 권력을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권력을 가치 있는 수단으로 선용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이 책임의 윤리에 헌신하는, 정치적 소명의식을 가진 진짜 정치가다. 막스 베버가 말하고자 했던 바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정치는 좋을 때만 가치를 갖는다. 나쁜 정치라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할 윤리적 기준은 없다. 나쁜 국가라도 있는 게 낫다라거나 악법도 무법보다 낫다는 논리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말이다. 무(無)국가 못지않게 나쁜 국가 또한 받아들일 수 없고, 무법 못지않게 악법에도 저항해야 하듯, 나쁜 정치에 대해서도 항의해야 한다. 그래야 이번은 아니더라도 제대로 정치하는 정치가들의 시대가 조금이라도 앞당겨질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대선은 제대로 된 의미의 정치와는 거리가 먼, '정치의 실종' 상황에 가깝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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