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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12월 27일 염소 키우던 모래사장이 초고층빌딩과 정치·금융의 중심지로, 여의도 개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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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1967년 12월 27일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와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여의도 개발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여의도건설기공' 버튼을 눌렀다. 당시 한국일보 보도를 살피면 여의도 개발의 가장 큰 난제는 요즘처럼 땅값이나 이주 대책이 아닌 장마였다. 장마철이면 침수가 일상이었던 모래섬에 안정적으로 건물을 올리기 위해선 높은 제방이 필요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섬을 둘러싼 제방인 윤중제가 건설되고, 4차선 도로가 놓이게 된다.
"서울시는 이 계획의 내년도 공사는 연초부터 서둘러 장마 전에 대충 끝내고 10월 1일 국군의날 행사를 이곳에서 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여의도 개발계획이 예정대로 성공할지는 내년도 장마 사정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 1967년 12월 28일 자 한국일보 지면 보러 가기 ☞ www.hankookilbo.com/paoin?SearchDate=19671228 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주소창에 URL을 넣으시면 됩니다.)
여의도 개발이 공식 시작된 후 불과 반년 만인 1968년 6월 1일 여의도에는 둘레 7,533m를 잇는 윤중제가 준공됐다. 장마 전에 제방 공사를 마치기 위해 밤낮없이 교대 인력을 투입했고, 인근의 밤섬을 폭파해 나온 돌을 건축자재로 썼다.
조선시대 여의도는 궁중 제사에 쓸 짐승을 기르는 관청인 전생서에서 염소와 양을 기르던 모래섬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군용지로 매수하여 비행장을 만들었다. 이후 1961년 김포공항으로 국제공항 기능이 옮겨가고, 1964년 국내 항공노선 일체가 이전하기 전까지 여의도는 우리나라 항공교통의 중심지였다.
여의도 개발은 1967년 9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한강건설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98만 평에 달하는 여의도를 한강의 인도교 높이에 맞춰 제방을 쌓고,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공공용지 25만 평, 사유지 8만7,000평 등 64만 평을 도시건설용지로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국군의날 행사 등을 할 수 있도록 ‘민족의 광장(준공 후 5·16광장으로 이름이 바뀜)’을 만들고 5층 이상 아파트단지를 건설해 고층도시로 형성하는 계획도 있었다.
개발 계획에 따라 윤중제 건설 이후 1971년 10월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이후 국회의사당, 방송국, 증권회사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가축을 기르던 모래섬이 명실상부한 정치와 금융의 중심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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