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하임의 외줄타기

입력
2021.12.2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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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오스트리아와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 재직 당시의 쿠르트 발트하임. un.org

유엔 사무총장 재직 당시의 쿠르트 발트하임. un.org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전범국인가 피해국인가?'

전간기(戰間期) 나치 '대독일주의(범게르만주의)' 이념에 따르면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는 독일 영토여야 했고, 다수의 오스트리아 청년들도 그 이념에 동조했다. 훗날 유엔 사무총장과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1918.12.21~2007.6.14)이 회고록('In the Eyes of the Storm', 1985)에 썼듯이 1차대전 전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잔해처럼 누추하고 무기력"했다. 그들은 독일을 원했다. 1938년 3월 독일군이 진주하자 당시 내각은 응전 대신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선택했고, 시민들은 독일 병합을 선택했다.

이런 정황 때문에 2차대전 연합국 진영에서는 오스트리아도 독일처럼 분할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오스트리아 내각은 오스트리아야말로 첫 번째 피해국이라고, 2차대전 기점은 독일의 1939년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병합이라고 항변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국' 카드로 분단을 모면했다.

병합 당시 만 19세 청년 발트하임은 나치 학생동맹과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에 가입했고, 22세에 독일 육군에 입대해 1945년 포로가 될 때까지 나치 정보·통역장교로 복무했다. 훗날 학계와 언론은 그가 유고 티토 파르티잔 및 유대인 학살 작전과 그리스 유대인 멸절수용소 수송작전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해법이 온건책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전범재판 대상도 대폭 축소됐고, 발트하임도 재판을 면했다.

그는 빈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승승장구, 유엔 대사와 외무장관을 거쳐 1972~1981년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고, 1986년 대선 기간에 그의 친나치 이력, 예컨대 1942년 부상으로 제대했다는 공식 이력이 허위로 드러났고, 크로아티아 나치 괴뢰정부의 훈장을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물론 그는 "전쟁범죄에 간여한 적은 없다"고 항변했다. 시민 53.9%가 대선 결선투표에서 그를 지지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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